전체 글 4746

순간을 지르는 순간 - 박봉준

순간을 지르는 순간 - 박봉준 벼랑 끝에 서 본 사람은 추락하는 새의 날갯짓이 더 매혹적인 순간을 안다 난간 끝에 서 있는 모녀의 두려움은 이미 허공으로 날리고 죽음을 앞세우고 저토록 진지한 생을 그려내는 모습이 나는 부끄럽다 서천의 붉은 구름이 그녀에게 속삭였지 생은 지나가는 바람이야 죽음은 가장 쉬운 방정식 번지점프대 위에 선 피에로 불신의 고리가 길어질수록 우리를 웃게 하지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 난간 끝에 서 있는 사람들 정말 마지막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다 *시집/ 단 한 번을 위한 변명/ 상상인 피고 지고 - 박봉준 전신마취를 하고 깨어보니 죽는 건 순식간이라는 말, 허언이 아니었네 채 꿈도 꾸지 못한 순간이 수술실 밖에서는 어느 한 생이 가장 긴 강으로 흘러 수없이 솟구치고 잠겼..

한줄 詩 2022.07.18

열매를 솎으며 - 홍신선

열매를 솎으며 - 홍신선 그동안 먹었던 과일 하나도 실은 얼마나 숱한 다른 도사리들의 희생과 헌납이 깊이 떠받들어진 것이었는지 간 봄날 쏟아져 나와 천지를 꽉 매웠던 그렇게 잠시 공중에 우르르 몰려나와 얼굴 붉히던 복사꽃들 지고 꽃자리마다 만원 전동차 안처럼 다닥다닥 매달린 작은 열매들 나는 그걸 솎아 준다고 나뭇가지에 성상(性狀) 좋은 놈 한둘 남기고 다 훑어 내린다. 그래도 결실 떠안을 놈만은 악착같이 움켜쥐고 매달린다. 그 풋열매는 떠맡은 그대로 이내 제 곳간을 열어 햇볕과 바람 그리고 끝내는 이 건곤마저 들여 쌓겠지. 올해도 잘 익은 복숭아 몇 알의 채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익지 못할 풋실과들이 죽어야 했는지 솎임을 당해 붕락했는지.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낙과를 보며 - 홍신선 완..

한줄 詩 2022.07.17

밥풀에 대하여 - 김신용

밥풀에 대하여 - 김신용 밥풀때기라는 말이 있다 쓸모없고 하찮은 것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유난히 정겨울 때가 있다 아기의 입가에 붙은 밥풀을 얼른 떼어 제 입에 넣는, 어미를 보는 날이다 이런 날은 쓸모없고 하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참 눈에 밟히는 날이다 밥풀 하나가, 마치 소우주처럼 눈앞에 밝아오기 때문이다 *시집/ 너를 아는 것, 그곳에 또 하나의 생이 있었다/ 백조 소금꽃 - 김신용 아무도 이 꽃을 본 적 없지만, 이 꽃은 있다 땀 흘려 일해보면 안다 사람의 몸이 씨앗이고 뿌리인, 이 꽃—. 일하는 사람의 몸이 소금이 꽃인, 이 꽃—. # 김신용 시인은 1945년 부산 출생으로 1988년 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 , , 등이 있다.

한줄 詩 2022.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