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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무사 - 조온윤

그림자 무사 - 조온윤 나를 대신해서 명랑하게 살아줄 그림자를 찾습니다 나에게는 실체랄 게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거든요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어주어서 나는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 내일의 일들 따위 잊어버리고 내일모레의 일들 따위 전부 잊어버리고 그림자는 나를 대신해서 친구들을 만나 하하호호 농담을 주고받았다 주말에는 낯선 애인과 영화도 봐주었다 되풀이되는 말싸움도 대신 해주고 사랑이고자 하는 게 곧 사랑이라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격렬하게 살아주었다 모든 게 가짜라는 걸 들키지 않았던 거 같지만 그림자야 진심이고자 하는 게 곧 진심일 수 있다면 가짜였던 마음은 언젠가 펄떡이는 심장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거기에 없어도 밤이면 거리는 어두컴컴해지고 가로등엔 불이 켜진다는 걸 안..

한줄 詩 2022.07.20

불모에서 별을 보며 울다 - 류흔

불모에서 별을 보며 울다 - 류흔 잊지 못하는 것은 잊을 수 없다 잊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지막이 처음에서 시작되듯 마지막 순간에 처음이 들어왔다 시간은 가로 건너는 풍경, 심장을 누르는 가벼운 공기들 중력이 없으니 수심(愁心)도 없으리 옆으로 깊어지는 숲으로 황혼이 안개처럼 깔릴 때 처음으로 마지막이 시작되었네 이런 벌판에 별은 곤란하므로 별이 박이기 전에 분위기를 사수(死守)해야 해 오늘은 어둠이 있었고 별이 떴다 순간적으로 누군가의 눈물이 흘렀지만 별에게 쏘아 올릴 총신(銃身) 한 그루 없는 불모지에서 나는 그만 중력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실 총체적 슬픔 - 류흔 이 밤에 무얼 생각해야 했을까 달이 게워논 따뜻한 토사(吐瀉)를 밟으며 ..

한줄 詩 2022.07.19

좋았던 옛날 - 정덕재

좋았던 옛날 - 정덕재 리어카를 끌고 가는 나이 든 할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리어카를 매달고 폐지를 쓸어 담는 젊은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오일장 좌판에서 다듬은 파 두 바구니 시들까 우산 하나 받쳐 놓은 할머니가 오이 가지 호박 부추 대파 쪽파 감자 양파 브로콜리 양배추 박스 열 개를 펼쳐 놓은 젊은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의사 아들이 건물을 지었다고 자랑하던 나이 든 할아버지가 요양병원에 들어간 다음 날 석션은 언제 하냐고 묻자 찡그리며 기저귀를 갈던 나이 든 간병인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고단하게 살다 보니 목숨줄이 더 모질어졌다며 송대관 노래처럼 해 뜰 날이 올 줄 알고 고단해도 견뎠..

한줄 詩 2022.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