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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 - 이정록

종달새 - 이정록 ​ 엄니, 벌써 와서 죄송해요. 수업 중에 집에 오던 버릇, 아직도 못 고쳤구나. 하여튼 애썼다. 도망친 건 아니에요. 저도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랐어요. 근데 저만 몇겹이나 잔디 이불을 덮었네요. 뼈마디만 남아서 어미는 평토장도 무겁단다. 고단할 텐데 며칠 푹 자거라. 억하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 천천히 평생토록 얘길 나누자꾸나. 엄니도 좋은 꿈 꾸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아무 말씀 안 하신데요? 녹아버린 애간장과 울화통이 또 터진 게지. 곧 뼈마디 추려서 일어나실 거다. 아버지가 칠성판을 발로 차도 죽은 척 누워 있거라. 꽃 필 때 보자. 아버지도 봄에는 종달새처럼 말이 많아진단다.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첨작 - 이정록 달밤에 지방을 태우고 엄니와 마루에 걸터앉아 뽕짝..

한줄 詩 2022.07.23

왼쪽 곁에 내가 왔습니다 - 김재덕

왼쪽 곁에 내가 왔습니다 - 김재덕 봄날 국수 한 그릇 먹고 굽은 느티 어깨 드리운 평상에 앉습니다. 꽃잎 몇 닢 날립니다. 담배 한 모금 낯선 손님처럼 사라지는데 왼쪽 곁에 누가 앉습니다. 어느 봄날 꽃비 내리던 서소문공원에서 세월 참 더럽게 안 간다 먼지 뽀얀 질경이한테 분풀이하던 젊은이군요. 발밑에는 그날 곁에 있었던 그녀 눈물 한 방울 제비꽃으로 피어 있는데 아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젊은이 날 두고 포로롱 혼자 날아갑니다. *시집/ 나는 왼쪽에서 비롯되었다/ 곰곰나루 개심사(開心寺) - 김재덕 서산 지나 해미 가는 길 늙은 작부 사타구니 같은 민둥산 헤집고 들어가면 가슴 환한 절집 하나, 개심사 있습니다. 키 큰 소나무들 내려다보는 검버섯 돌이끼 계단 오르다 보면 문득 내려다보는 천 년 기억..

한줄 詩 2022.07.22

줄넘기 - 조숙

줄넘기 - 조숙 그동안 만났던 줄을 넘는다 줄을 보고 따라갔다가 낯선 입구 앞에 덩그러니 남겨지던 경계를 두 손으로 잡고 넘는다 뒤통수를 맞거나 발목이 걸려 넘어져도 무릎 굽히며 줄을 넘는다 굽힐수록 다치지 않는다는 것 날지도 못하는 두 팔 날개인 듯 믿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시간은 가고 그렇게 삶의 근육이 커질 것이라고 믿으며 줄을 돌린다 바닥을 쳐봐야 살길이 보인다는 오래된 전설 줄을 만날 때마다 바닥을 딛고 날아올라야 하는 고단한 연속 줄넘기 어두워진 미끄럼틀 아래에서 줄넘기를 한다 *시집/ 문어의 사생활/ 연두출판사 흘수 - 조숙 내가 타고 가야할 미래는 올라타면 움찔한다 작은 바람에도 좌우로 흔들린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두려움, 가끔씩 튀어 오르는 호기심으로 마음 두근거리고, 멀리 지나가는 물결..

한줄 詩 2022.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