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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므로 - 김희준

하지만 그러므로 - 김희준 망가진다 단지 읽어낼 수 있는 건 문양뿐이다 삐걱거리는 순간 방의 조직이 괴사한다 열어둔 통조림에서 이국의 햇빛이 쏟아진다 알루미늄 뚜껑에 생이 베인다 달콤한 피가 고인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 환풍기로 잘리는 바람이 물컹하다 높아지는 천장에서 뭘 하면 좋을까 잘린 바람이 머릿속을 헤맨다 몇 구의 사체가 곁에 눕는다 단물을 뱉자 햇빛이 목에 걸린다 동굴은 퍼지는 것을 오래 잡아둔다 이국의 태양과 절름거리는 바람이 다음 세기까지 머무를 것이다 파인애플 진액이 팔꿈치로 흐른다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나를 저미는 순간 태양이 몸을 푼다 밀고와 열고의 차이를 안다면 동굴을 빠져나오는 거야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

한줄 詩 2021.04.12

꽃의 장난 - 손음

꽃의 장난 - 손음 꽃은 나뭇가지에 앉아 간들간들 논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간들간들 논다 바람과 햇볕이 사귀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은 격렬하게 꽃과 놀다 헤어지는 일 꽃은 사내처럼 가는 것이고 사내처럼 오는 것이다 나는 여배우처럼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흥청망청 꽃을 운다 꽃나무 아래 서서 지나가는 세월을 구경한다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의 이름이 통증을 만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졌을 때 이별을 만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을 때 잔인해졌다 이별은 허술한 요리사가 만드는 싸구려 음식 같은 것 오늘은 봄이고 나는 꽃을 만나러 간다 꽃을 헤어지러 간다 울면서도 가고 자빠지면서도 간다 내가 어쩌다 걱정한 꽃이 우리가 어쩌다 미워한 꽃이 그곳에 산다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내가 ..

한줄 詩 2021.04.11

성층권의 황혼 - 허진석

성층권의 황혼 - 허진석 인천에서 이륙해서 석양을 맞으면 태양계의 행성들이 반대편 창에 줄을 선다. 한 겁에 딱 한 번 일렬로 서서 모세의 바닷길처럼 바짝 마른 길을 낸다. 명왕성까지 간다. 오후 일곱 시 발 에어버스, 흑인 승무원이 적포도주를 따라주는 복도 끝 캄캄한 저곳에서 선명한 그림자 속에서 내려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고 누군가 고함을 친다. 아버지다, 어머니다, 명왕성이다. 가장 먼 그곳에 가 보지는 못했어도 본 사람은 있다. 새벽별 눈에 담은 싯다르타나 저 아래 중앙아시아의 산맥 위를 나는 독수리 얼음과 붉은 대지와 콸콸 흐르는 강산强酸의 하천을 노래한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곳에 살아 나 모르게 죄를 지었다면 인연의 새 사슬을 끌며 아들과 딸과 미처 보지 못한 기억마저 기다리리라. 젊은..

한줄 詩 2021.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