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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운다면 - 손남숙

꽃이 운다면 - 손남숙 어느 집 슬레이트 지붕 골짜기로 흘러 내려오는 붉음 같겠지 박태기는 선명한 분홍색을 핏물처럼 빼내는 중이었어 빈집 꼭대기 위로 올라가 하염없이 머나먼 길을 돌아온 어느 자식의 긴 밤을 같이 보내려던 것이었지 마침 곁에는 밤새 엿듣는 나무가 있었어 벚나무는 우연히 흘러 들어온 방랑객처럼 그 집 마당 구석에 서 있었지 뭔가 운명처럼 서로를 맞대 보는 날도 있는 거지 봄날에 먼저 쏟아지는 건 벚꽃이야 흩날리며 제 울음을 바삭하게 말려 보내면 옆에서 가만히 들어 주던 박태기가 별안간 깜짝 놀랄 분홍색을 만들어 슬그머니 금이 간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꽃들의 눈물이 배어 들어가 눈물은 천장을 타고 무너져 가는 서까래 밑으로 떨어지겠지 삐걱거리던 마루는 다 뜯겨 나가고 없어 꽃잎들이 낱낱이 듣..

한줄 詩 2021.04.19

총상화서 - 류성훈

총상화서 - 류성훈 봄은 한 번도 봄에 이른 적 없고 너무 가벼워 담장 어디에서도 주울 수 없는 발소리가 땡볕 아래의 줄기들을 깨운다 용서 같은 건 받는 쪽보다 하는 쪽이 나을 줄 알았어, 네가 아침을 그렇게 닮은 줄 몰랐던 나는 주전부리 하나 없는 저녁만 닮아 갔다 나무도 링거를 맞는 세상이네 그런 소리나 하면서 기약 없는 인사를 늘려 가면서 우리는 더 가벼운 곳으로 꽃잎들이 다시 하늘로 졸도한 온도계 눈금을 손금처럼 펴 보이는 네겐 모든 상처들만 유채색이었다 밀과 보리가 자라듯 우리는 무한히 자랄 줄 알았지 다르게 자란 건 죄야, 나는 너를 탓하고 너는 봄을 탓하며 젖은 잎을 주웠다 웃으면서, 웃으면서 끼워 놓은 책은 다시 펴지 말자 아무리 걸어도 마주치지 않을 계절 앞 봄,이라는 말은 더 근질근질했..

한줄 詩 2021.04.19

없는 것보다 못한 - 여태천

없는 것보다 못한 - 여태천 어둠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일 때 하나둘씩 카드를 접기 시작했다. 마감뉴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재수 없다. 메시지는 저 멀리서 온다. 간절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상황은 언제나 최악이다. 한 사람은 이제 걷기 시작했지만 한 사람은 지금 막 주저앉는다. 누군가를 웃게 하는 누군가를 울게 하는 언제나 몸은 피가 모자라고 그 사실은 숨길 수 없다. 만질 수 있는 따뜻한 손이 아니었다. 너무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음사 슬픔은 자란다 - 여태천 잘 자라지 않았다. 당신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나이스했지만 아침 일찍 벌레를 잡는다는 새 이야기는 좋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당신이 기억하고..

한줄 詩 2021.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