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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수리점 - 안채영

봄날 수리점 - 안채영 물 담긴 고무 대야에 자전거 튜브를 넣자 자잘한 공기의 씨앗이 흘러나온다 날카로운 못 하나가 뚫어놓은 곳으로 파종되는 봄날의 공기들 바람이 새는 곳을 찾아 접착제 묻은 햇살 하나 붙여두면 다시 굴러갈 둥근 바퀴들 문득, 잠깐 멈추었던 지구가 다시 도는 듯 차르르 체인 도는 소리가 들리고 수리가 끝난 바람의 핸들을 잡고 짧은 봄날이 간다 날카로운 못 하나를 줍고 싶다 부푸는 벚꽃나무를 찔러 바람 빼면 우수수 날리며 쏟아져 날릴 흰 꽃잎들 달력을 찌르면, 생일을 찌르면 다 빠져나가고 남을 숫자 없는 생 바쁜 봄바람이 잠시 서 있고 흰 머리카락 한 올 같은 깊은 실금을 내고 있는 봄 고장 난 봄바람 몇 대 세워놓고 고무 대야에 물 담아놓고 있는 자전거 수리점 바람 빠진 몇 번의 봄을 끌..

한줄 詩 2021.04.16

봉인된 시간 - 신철하

코로나 시대에 일상이 엉망이지만 그래도 영화는 끊지 못한다. 공연장이나 전시장 나들이는 아직 꿈도 못 꾸고 가능하면 식당 출입도 자제하거나 머뭄을 최소화한다. 모임이나 술자리 참석도 안 간 지가 까마득하다. 인간 관계 소원해질 염려보다 방역수칙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둘 이상 갈 때 빼고는 영화관 출입은 보통 주말 오전을 이용한다. 인기 영화보다 남이 잘 안 보는 다큐 영화나 독립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런 영화일수록 오후보다 오전 시간에 많이 상영한다. 관객이 거의 없어 거리두기 걱정도 없고 요금도 싸니 일석이조다. 얼마전 토요일 오전에는 나 혼자서 영화를 봤다. 극장을 자주 못 가서 생긴 영화 굶주림을 넷플릭스로 푼다. 극장에서 보는 것만큼의 감동은 못 느껴도 잘만 하면 극장 나들이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네줄 冊 2021.04.15

전화번호를 지우다가 - 박윤우

전화번호를 지우다가 - 박윤우 우리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와 묵은 이명씨(耳鳴氏)가 산다 오늘따라 내가 흔하다 나는 계단참이고 우산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풍경이다 우스운 일에만 웃는다 인적 드문 내소삿길, 인중 긴 꽃을 내려다보며 눈으로 만졌다 무슨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꽃 풀 먹인 모시적삼 깃동 같은 녀석에게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다 거기, 매발톱 꽃은 폭발이 아니라 함몰이다 사월의 허리를 부축하는 미나리아재빗과 누두채(漏斗菜) 대궁 위의 푸른 뿔, 안으로 안으로 구부리는 푸른 화판 끼리끼리 붐비며 함몰 중이다 잎도 안 난 노루귀가 매발톱 따라 고개를 꺾는, 매발톱과 노루귀 사이 너를 묻으며 비를 맞았다 돌아와, 식은 밥에 물 말아먹고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를 지우는데, 이명씨(耳鳴..

한줄 詩 2021.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