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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태양계 - 피재현

엄마의 태양계 - 피재현 엄마 방에는 여섯 명의 환자들이 있다 여섯 명의 평균연령은 대략 88세쯤 팔십하나 엄마가 평균을 많이 깎아먹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고 했으니 엄마의 요양원은 소멸해 가는 별들의 태양계 늙은 별들이 사라지고 샛별 대신 다른 은하계 낡은 별들의 이주로 채워지는 유배의 태양계 이 태양계는 유난히 유성이 많아 남은 별들은 궤도를 이탈해 떠나간 어제의 유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더러는 유성이 되고 싶어도 하고 엄마는 아직도 외계의 존재를 믿으며 밤마다 우주복을 깁는다 엄마가 꿈꾸는 외계는 깨꽃이 피고 냉이가 지천이며 하루 들에 나가 일을 하면 오만 원을 주는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이다 나는 그 외계에서 우주선을 타고 엄마를 만나러 부실한 태양계에 자주 진입하지만 내 우주선은 일 인승이라 ..

한줄 詩 2021.04.15

그녀가 두고 간 쪽지 - 김보일

그녀가 두고 간 쪽지 - 김보일 잠든 남자의 머리맡에 새 신 하나를 놓아 주고 여자는 일력의 뒷면에 쪽지를 쓴다 참개구리가 울고 살구꽃이 피고 물양귀비의 가랑이 사이로 물고기들이 숨고 아픈 나무의 발목에도 새들이 지저귈 거에요 바람이 울고 간 자리마다 못 보던 풀들이 돋아나면 당신은 이마 위에 얹힌 물수건을 걷고 어느 낯선 동리의 나무 아래를 지나가며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구름에 적어 보내실 테죠 햇살이 아침의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시간 목련나무 아래 그녀가 써 놓고 간 문장이 가득하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보길도의 밤 - 김보일 달빛이 붉은가시나무와 쥐똥나무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밤, 여인숙 이부자리에서 길 잃은 터럭 하나를 주웠다 노련한 사냥꾼은 잠자리만 보아도 어떤 동물이 묵고 갔는지, ..

한줄 詩 2021.04.15

연분홍 유언이 있었다 - 천수호

연분홍 유언이 있었다 - 천수호 노래만 남기고 꽃잎은 가져간 사람이 있다 투병은 길었다 만개하기 전에 꽃잎이 먼저 부스러져서 그는 잘 보지 않는 책갈피를 열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핏기도 핏물도 없는 페이지에 잘 찍은 발자국처럼 꽃잎 가랑이를 찢어도 보았구나 그래, 당신이었어! 언젠가 그를 그렇게 열어볼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그는 더 먼 곳에 있겠다고 했으니 꽃잎은 병색도 모르고 그를 따라갔고 물기가 빠져나간 페이지에 이야기들만 남아 개미처럼 기어다니겠지 한 페이지 넘기고 듣고 한 페이지 넘기며 따라 부르고 그런 사랑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납작해진 꽃잎을 간혹 건드려 깨워야지 딱풀처럼 잘 붙은 사랑 얘기는 다시 열지 말까? 오래 덮어둔 책이 있는지도 모르는 날이 올 테니까 꽃잎만 남기..

한줄 詩 2021.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