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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 황현중

여기에서 - 황현중 너무 멀리 가지 않기로 한다 다시 돌아와야 할 여기 오늘을 잊지 않기로 한다 두근두근 오늘을 떠나지만 지친 발걸음이 쉴 곳은 애오라리 여기뿐 작은 죄가 늙은 어미의 품에 안기고 열두 줄 가야금의 현을 누르듯 슬픈 사람들의 숨소리가 잦아드는 여기에서 하루의 후회를 정갈하게 다듬어 일기장 안에 눌러 쓰고 떠오르는 눈썹달 바라보면 저절로 솟는 쓸쓸한 미소 같은 오늘을 가득 사랑한다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한다 다시 돌아와야 할 여기까지 나를 생각하고 너를 그리워한다 세상 안에 온몸 부린다 *시집/ 구석이 좋을 때/ 한국문연 길바닥 - 황현중 소중한 줄 몰랐습니다 날마다 흔들리는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는 이 길바닥이 길바닥 모퉁이에 핀 개불알꽃이 예쁜 줄 미처 몰랐습니다 옆구리에 ..

한줄 詩 2022.07.29

보리밥 그릇에 사람이 있네 - 오창근

좋은 산문집 하나를 읽었다. 오창근이 쓴 다. 유명 작가는 아니다. 작가라기보다 교육자라고 해야겠다. 대학 졸업 후 학원 강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강사를 10년쯤 하다 몇 개의 직업을 거쳤다.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과 비슷할까 하는 대목이 수두룩해서 놀랐다. 베스트 셀러 같은 유명 책보다 숨어 있는 책을 발굴해 읽는 것이 내 책읽기의 목적이기에 그걸 제대로 달성한 것 같아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어디 여행 갔더니 풍경이 너무 좋았다. 맛집 가서 맛난 것을 먹고 행복했다는 등 흔히 수필집에 나오는 일상이 이 책에는 없다. 부모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자신이 겪어온 날의 단상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 안에 쌍둥이처럼 내 가족의 삶과 내력이 들어 있다. 작가는 8남매 중 일곱 번째인데 여..

네줄 冊 2022.07.29

감나무 아래에서 - 김애리샤

감나무 아래에서 - 김애리샤 가지가 휘어지도록 우르르 생겨난 감들 그중 작고 못난 감들을 밀어내는 나무 떨어진 감들은 감나무 아래 풀섶 어딘가에 떫은 피로 스스로의 상처를 덮는다 아홉 살 애란이가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 감나무 아래로 달려가는 일 이슬에 발이 다 젖도록 상처난 감들을 줍는 일 풋감 몇 알 주워 쌀독에 묻어 두면 상처에 새살 돋듯 주홍색으로 예쁘게 익어 가던 감 빨리 예뻐지라고 손가락으로 살살 눌러 보면서 애란이도 말랑말랑 익어 갔다 이파리조차 많이 달지 못하는 늙은 감나무 아래에서 풀섶을 뒤적인다 작은 상처들이 아물어 가며 달콤해진다는 것을 사십 년 전 아이는 알고 있었을까 각자 다른 곳에서 같은 계절들을 지나온 사이 제가 맺은 열매를 제가 버리며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며 늙..

한줄 詩 2022.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