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746

너무 상투적인 삼청동 - 홍지호

너무 상투적인 삼청동 - 홍지호 사랑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다짐들 헤어지지 않고는 적을 수 없는 예언과 미치지 않고서야 미칠 수 있었겠는가 견디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희망이라는 생각 거품처럼 거품같이 겨울처럼 겨울같이 걷다보면 걷게 된다 예언 속을 생각하다보면 생각의 끝에 도착할까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삼청동 길을 걷다가 문득 여기에 살고 싶다 살 수 없겠지 말했을 때 말에는 힘이 있다 살 수 있다 말해보라고 말해준 사람은 너였지 귀신들이 하는 말을 듣고 도와준다고 한 사람은 너였지 삼청동에 살고 싶다 삼청동에 살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말하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 말해준 사람은 너였는데 나는 삼청동에 살고 있다 지금은 어디서든 삼청동에 살고 있다 ​ *시집/ 사람이..

한줄 詩 2021.04.20

항소이유서 - 유시민

#유시민이 26세 때 암기해 일필휘지로 썼다는 항소이유서 전문이다. 법률 용어가 친숙하지 않는 것처럼 이 글도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딱딱한 문장이다. 특히 내가 경어체 문장에 적응을 못 하는데 이 글은 술술 읽힌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재주다. 유시민은 천상 작가다. 항소이유서 - 유시민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

여덟 通 2021.04.20

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 정연철

시는 가슴에 작은 냇물을 만든다. 내 속에 존재하는 온갖 감정들을 냇물에 실어 보내자 시가 온몸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뻗어 나간다. 마음에 동요가 인다. 열 일곱 살 소년이 기형도 시를 읽으며 이런 감정을 느낀다. 나는 스물 일곱에도 천방지축 노느라 잘 몰랐던 시를 소년은 자기 가슴에 온전히 담을 줄 안다. 방과 후 물기를 한껏 머금은 숲길을 걸으며 이런 시를 쓴다. 우울의 심연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비 오는 날,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나무들, 혼돈희 틈을 타 은밀하고 용의주도하게 눈물을 흘려 보낸다 저 눈물 소진하고 나면 햇살에 반짝, 자체 발광하겠지 그렇다면 나 지금 지체 없이 울어야 할 때 실제 소년은 자주 운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가 생각나서다. 엄마가 보고 싶고 미안해서다. 소년은..

네줄 冊 2021.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