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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고등어 - 손석호

간고등어 - 손석호 오른손이 의수인 그는 어선을 탔었다고 했다 노을이 도마 위 핏물을 벌겋게 덧칠하자 무쇠 칼이 고등어 배를 가르던 왼손을 놓아주었다 목장갑에 달라붙은 왕소금을 털어 낼 때 화구 밖으로 거세게 역류하는 화염 파르르 얼굴에서 출렁이는 난바다 석쇠를 뒤집는 팔뚝 근육이 로프처럼 팽팽하게 솟았다 한 번도 눈감지 않은 고등어의 눈알과 마주쳤을 때 연기 때문에 맵다며 갱빈으로 걸어 나갔다 내성천이 바다로 가는 물길을 보여 주자 꾹 깨문 입술 쪽으로 왕소금처럼 왈칵 뿌려지는 눈물 억새 무리 어둡도록 파도가 되어 주고 버들가지가 뺨을 훑어 주는 동안 강물이 이유를 묻지 않고 따라왔다 배를 가른 고등어의 안쪽 등뼈 같은 억새밭 샛길을 가로질러 돌아오며 눈가에 핀 소금꽃 털어 냈다 골바람도 나와 앉은 툇..

한줄 詩 2021.04.21

찢어진 고무신 - 이산하

찢어진 고무신 - 이산하 감옥의 독방에 살 때 내 옆방에 젊은 사형수가 들어왔다. 세상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는 한겨울에도 사각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혼자 운동장을 달렸다. 우리는 서로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가끔 통방을 했다. "오늘은 몇 바퀴 뛰었어요?" "어제보다 한 바퀴 덜 뛰었어요." 대답은 늘 똑같았다. 그게 몇 바퀴인지 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덜 뛰는' 날이 없을 때가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짐작만 했다. 멀리 구치소 담장 위로 낙엽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느날 아침이었다. 평소 수런거리던 복도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유난히 큰 교도관의 발자국 소리가 옆방에 멈췄다. "수번 5046번 접견!" "오늘 면회 올..

한줄 詩 2021.04.21

더 이상 운세를 보지 않기로 하였다 - 백애송

더 이상 운세를 보지 않기로 하였다 - 백애송 달력 틈새에 끼여 있던 날 많은 날과 날들에게는 짠맛이 났다 눈을 뜨면 운세를 검색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하루 오늘 해야 하는 것보다 오늘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더 집중하던 날 피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은 늘 어긋났고 누군가는 내 말에 정중한 매듭을 지어 버렸다 사용하지 않은 삶의 근육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방관되었다 오늘은 무사히 벽에 박힌 하루를 빼낼 수 있을까 *시집/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걷는사람 별책부록 - 백애송 중요한 순간은 미끄러져 지나간다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뎠다 손등에 남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그곳은 허방이었다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기대는 서로의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뜸만 들..

한줄 詩 202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