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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필 무렵 - 허림

감자꽃 필 무렵 - 허림 언제든 떠날 애인이었다 집은 자주 비었고 방에선 오래된 냄새가 났다 개들이 짖는 게 낯설지 않았고 괭이들이 뒤돌아보며 뒤란에 몸을 숨겼다 내 모르는 소문이 떠돌았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감자꽃이 피고 그믐밤도 길은 환했다 애인이 떠난 저녁이었다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출판사 삭망 - 허림 갈 길이 쇠털같이 많다고 했지만 꽃들은 지금 한창 장터에서 만난 몇몇은 다음에 밥이나 먹자고 했지만 그는 내 손을 잡아끌고 아리랑순댓국집으로 들어갔다 순대에 딸려 나온 허파와 혓바닥 염통 오소리감투 오늘이 지나간 날들이 달력에서 희미해지고 오는 금요일이 며칠이니 무슨 요일이니 물었을 뿐 아무도 지나간 시간이 언제 오냐고 묻지 않았다 설사 꿈이 찾아왔어도 '참 시안타 무슨 일이지' ..

한줄 詩 2021.04.23

살아 있는, 유령들 - 이기영

살아 있는, 유령들 - 이기영 -음해 몰라서 죄가 되기도 한다 한결같이, 네가 내게 보내 준 달콤한 혀에서는 말랑말랑한 웃음이 계속 터져 나오고 어쩌나, 꽝꽝 얼어붙은 표정을 포장한 너는 수시로 뒤틀리다 습관이 된 줄을 몰랐다 숨기는 건 습관성 다람쥐가 땅속에 수없이 많은 알밤을 묻어 놓고 찾지 못하는 것처럼 숨기는 것이 많을수록 도처에 가능성은 허다해진다 싹이 될지 함정이 될지 아무도 모른 채 지층 아래 마그마가 끓어 오르는 자리는 충혈된 가시들을 단련시키기 좋은 포인트 억울한 심정에는 특화된 자리 천사처럼 너는 웃었는데 웃음은 공갈빵처럼 부풀었는데 언제 터져 버릴지 모를 그 웃음 뒤에서 덮어 버리기엔 손이 너무 시리고 돌아서 버리기엔 등이 너무 허전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죄인이 된다 *시집/ 나는 어제..

한줄 詩 2021.04.23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늙는다 - 전인식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늙는다 - 전인식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로 늙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꽃이 필 때와 질 때 불과 며칠 사이 나는 일 년 치를 한꺼번에 늙는다 피와 살이 강물처럼 빠져나가고 어디론가 뒤따라간 마음 또한 돌아오지 않는 들불이 지나간 듯 허허로운 가슴 기슭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발이 날리며 한순간 사계절이 일순할 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일도 하늘 날아오를 듯 날개짓하는 열망과 물속으로 가라앉는 돌 같은 체념도 다 이맘때 일어나는 일 뜨겁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불과 며칠 사이 나는 늙는다 선명한 나이테 무늬를 그리며 단박에 늙는다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로 늙는다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 불교문예 뱀, ..

한줄 詩 2021.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