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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대릉원 - 이운진

밤의 대릉원 - 이운진 이 밤 누가 나를 돌려세워 미혹(迷惑)을 고백하게 하나 나는 지친 걸음으로, 그보다 더 지친 영혼으로 어둠 속을 들여다본다 둥근 달빛 둥근 무덤 사이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삶에서 건너오는 듯 수 세기의 바람이 지나가는데 짧은 생애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나였던가 아무도 기억 못 할 글을 쓰는 수인(囚人)이었고 사랑이 던져버린 돌멩이였으며 슬픔의 징후였으니 이곳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추방자였던가 이제 젊음도 없이 젊은 나를 데리고 나 자신의 허구로 사는 날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한다 빠져나갈 수 없는 아프고 허망한 이 삶도 선물이라는 말로 불러도 되는 건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신을 향해 대답 없는 질문을 하며 둥근 달빛 속 둥근 무덤에 가만히 누워본다 한때 눈물이었고 영광이었던 모..

한줄 詩 2021.04.26

기억에는 라일락이 핀다 - 정선희

기억에는 라일락이 핀다 - 정선희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꽃잎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내게 그가 건넨 말이다 캠퍼스를 지날 때마다 라일락 향기가 났다 이상하지, 그가 지나는 어디든 그랬다 바람은 꽃잎을 건드려 향기를 맡는 이라 했다 그의 손동작이 나비처럼 우아해서 내 가슴 위에 내려앉는 나비를 꿈꿨다 속눈썹이 촉촉한 꽃잎 같아 남자 눈이 왜 이리 예뻐요? 차라리 울다가 방금 세수하고 나왔어요,라고 말했더라면 모시나비 날개처럼 섬세한 날개를 꺼내 안아줬을 텐데 손을 잡으면 깜짝 놀라곤 해서 나는 자꾸 장난을 쳤다 뭔가 바뀐 것 같지 않아요? 돌을 치우면 숨을 곳을 찾는 가재처럼 그가 스며든 구석구석 들추며 깔깔거렸다 사귈래요? 여자가 무서워요 사랑 때문에 누나는 수녀원 잠긴 창문이 됐죠 별을 믿지는 않..

한줄 詩 2021.04.26

잡지의 사생활 - 박찬용

잡지를 여럿 정기 구독하던 시절이 있었다. 문예지 한 권, 영화, 여행, 예술지까지 서너 권은 기본이었다. 한창 호기심 많고 싸돌아 다닐 때라 가볍게 세상 흐름을 읽는 데는 잡지가 가장 좋았다. 사는 것이 시들해졌기 때문일까. 지금은 문예지 하나 남았다. 그것도 정기 구독이 아니라 서점 나들이에서 구입한다. 서점에 갈 때마다 구경 삼아 들춰보는 잡지는 여러 종 있다. 요즘 잡지는 비닐에 싸여 있어서 사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잡지도 꽤 된다. 하긴 잡지사 입장에서는 대충 읽고 맛만 본 후 안 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영업 전략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요즘 잡지도 생존 전략이 치열하다. 예전에 좋아 했던 알찬 잡지들도 경쟁에서 밀리고 적자를 견디지 못했는지 사라진 잡지들이 많다. 하긴 나부터 요즘 잡지를..

네줄 冊 2021.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