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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에 잠들다 - 우남정

초록에 잠들다 - 우남정 꽃이 들판을 온통 봄으로 물들이고 간 뒤 먼 산 뻐꾸기 울음 아슴아슴 들려온다 아직도 갈대숲에는 빈 대궁들이 서걱거린다 꽃과 씨앗 다 떠나보내고, 그들은 왜 머리채 휘어잡는 바람과 맞서 긴 겨울을 건너왔을까 취한 아비들이 정거장에서 막차를 기다리듯 휘청거리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넘어질 듯 일어서고 있는가 쭈그리고 앉아 그 어둑한 밑동을 들여다본다 젖은 발가락 끝에 송곳니처럼 솟은 두어 뼘의 어린 초록이 보인다 저 어린것들이 제 어미를 먹어치우고 있었던 것일까 낮과 밤을 넘나들며 초록이 초록이 번진다 무엇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저 해묵은 손짓은 눈물 번득이는 칼날 가슴 언저리까지 차올라 차라리 그 초록에 찔려 죽고 싶다는 뜻일까 그예 한 세대를 넘겨주는 것일까 가녀린 쭉정이들의 장엄한..

한줄 詩 2021.04.28

불편한 잠 - 송문희

불편한 잠 - 송문희 뿌리가 뽑혀 떠내려온 몸들 음지에 구겨져 있다 빌딩숲은 야멸차다 햇빛을 끊어버리고 찬바람만 떠먹인다 어떤 나무들은 목에 이름을 걸고 이름을 찍는 순간 회전문이 열린다 지하도로 몰린 풀들은 이름마저 잊어버린 잡초인가 혹여 한곳에 오래 버티면 뿌리내릴 수 있을까 무료 급식에 기대 그 자리에 다시 눕는다 눈총을 덮어쓴 까만 얼굴은 체면을 까먹고 느릿느릿 근육을 줄이고 있다 박스로 구들을 깔고 신문지로 낮잠을 덮었다 지나가는 바람들은 멈춰 서서 무명을 딛고 일어선 가수의 넘치는 햇살을 읽느라 웅크린 잠을 펄럭거린다 불편에 길들여진 노숙의 잠은 금 하나 가지 않는다 *시집/ 고흐의 마을/ 달아실 흔들리는 봄 - 송문희 툴툴거리는 용달차 뒤칸 솜사탕 기계에 기댄 채 단잠에 빠진 여자 신호등이 ..

한줄 詩 2021.04.28

울릉도 오딧세이 - 전경수

나는 울릉도를 세 번 다녀왔다. 파릇파릇해서 청춘이라 했던가.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1986년에 처음 갔던 울릉도의 추억을 어찌 잊을 것인가. 지금이야 쾌속선이 있지만 그때는 포항에서 가는 여객선이 유일했다. 뱃시간만 네다섯 시간 걸렸을 것이다 민박촌 아주머니들이 뱃시간에 맟춰 마중을 나왔다. 일종의 호객행위다. "우리집으로 가입시더." 목소리 작고 제일 얌전한 아주머니를 따라 갔다. 금방이라는 말과 달리 한참을 가서야 도착한 경사진 마을 중턱이다. 덕분에 멀리 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풍광이 좋았다. 그때는 여행길에 코펠 버너 챙겨 가서 민박집에서 밥을 해 먹어야 했다. 이틀을 묵는 동안 내가 식사 준비를 하면 생선 조림이나 몇 가지 반찬을 갖다 줬던 기억이 난다. 나리봉도 가고 성인봉도 오르고 새벽부터 돌..

네줄 冊 2021.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