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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무덤 - 천수호

이불 무덤 - 천수호 우리집 이불 속 역사는 약사(略史)로만 전해진다 저 속에서 얼마나 자주 아이를 잉태했는지도 저걸 덮고 큰언니가 죽어나간 일도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 간단한 엄마의 말로 요약되어 가끔 끙, 하는 신음에만 묻어나올 뿐 완전한 진실은 다 묻혔다 어린 내 발등에 차인 아버지 밥그릇이 두어 번 발라당 넘어졌어도 아버지는 묵묵히 머리카락을 떼고 밥그릇을 다 비우셨고 스테인리스 밥그릇의 절절 끓는 온기가 내 발끝을 자주 녹였다는 것도 묵인된 역사였다 누구 발등인지 모를 매끈한 살결에 은근히 발을 잇대기도 했고 그 촉감만큼 매끄러운 눈물도 이불 속에서는 잘 묻혔다 부화된 아이들은 무럭무럭 그 이불 속에서 자랐고 이불 속으로 도저히 두 발을 숨길 수 없을 때는 하나씩 집을 떠나갔다 하얀 목화솜이 따글..

한줄 詩 2021.06.01

견고한 낙화 - 손석호

견고한 낙화 - 손석호 ​ 감꽃 지던 마당에서 엄마 되는 게 꿈이던 오월의 아이는 청보리밭 두렁에서 파랗게 흔들렸다 소꿉놀이 밥상에 감꽃 밥을 차려 놓고 쓰러진 보리처럼 수상한 황변이 왔다 아파 보였지만 소리 내어 울지 않고 엄마처럼 눈빛으로 우는 걸 흉내 내고 있었다 늦은 봄비 소란스러운 밤 비 갠 마당에 찍힌 의문스러운 발자국에 빗물이 가득 고였고 감꽃이 흥건했다 대문 밖 청보리밭을 바라보는 동안 툭 툭, 양철 지붕에서 들리는 빗소리 처마로 떨어진 감꽃이 도르르 눈앞으로 굴러온다 모든 꽃이 낱장 꽃잎으로 부서져 날아갈 때 감꽃은 온몸으로 지고 오래 참은 비꽃처럼 무겁다 해마다 아이는 감꽃처럼 견고하게 오고 내 안의 얇은 지붕을 밤새 두드린다 오월의 밤은 꿸 것이 많고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시집/ ..

한줄 詩 2021.05.31

흔들리며 고맙다고 - 김형로

흔들리며 고맙다고 - 김형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몸 몸의 주름이 펴지지 않는다 굽은 곳은 더 틀어지고 패인 곳은 더 깊어졌다 아픈 몸을 자주 미워했지만 몸은 나를 사랑하기만 했다 비극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 티격태격 도니 말 없던 몸이 말을 한다 귀에서 여치 소리 나고 눈에는 벌레가 난다고 무릎은 녹슨 돌쩌귀 되었다고 밤마다 몸에게 묻는다 오늘 하루 어떠셨냐 손으로 만지며 쓰다듬는다 몸이 답한다 힘닿는 데까지 가 보겠다고, 숨소리가 많이 얕아졌다 함부로 부렸구나 다음 생이 있거든 내가 몸이 될 테니 너는 내가 되거라 결기 없고 시류도 못 맞추는 내가 한쪽 쳐진 몸과 함께 오늘도 어제처럼 간다 절뚝절뚝 흔들리며 고맙다고 힘들면 잡고 서서 높다란 새를 함께 보면서 *시집/ 백 년쯤 홀로 눈에 묻..

한줄 詩 2021.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