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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 피재현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 피재현 허청허청 문상 다녀오셔서 큰 마루에 대자로 누우시던 조부님 양은 주전자 들고 불알도 덜 영근 내가 밭둑길 걸어 퍼 나르던 조부님 막걸리 연고도 없는 저승에서는 누가 나 대신 술심부름 할까 옛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몇몇 우화들을 함께 넣는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이를테면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 이를테면, 십수 년 만에 돌아 온 큰누나의 분 냄새 같은 것, 낯선 사내에게 '매형'이라고 처음 불러보던 이상한 기표(記表) 한 번도 주인공인 적 없었던 풍경 속에서 나를 빼내 온다 내가 없는 풍경 속에서 도화(桃花) 진다 할아버지 돌아가신다 *시집, 우는 시간, 애지출판 부고 - 피재현 문상 가서 허기를 용서하는 데 오래..

한줄 詩 2021.06.09

타인의 삶 - 오두섭

타인의 삶 - 오두섭 불 꺼진 날이 왜 많은지, 알려고 하지 않은 창가의 밤 서쪽 외벽을 타고 온 해가 모서리로 떨어지면서 짙은 그림자를 남기며 나뭇가지들이 그곳을 기웃거리는 그때 저 창이 오늘은 왜 열려 있는지, 어쩌다가 무심코 열려서 나와 눈이 마주칠 뻔한 풍경의 계단 아래로 슬그머니 내려가서 올려다 보면 혼자 레몬 즙을 짜고 있거나, 시집의 한 쪽을 반복해서 읽고 있거나, 그러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거나, 남자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있을지도, 둘이 함께할 날들에 관해 심각한 담화를 나누고 있는 중인지도, 갑자기 외출을 서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내 화풍은 사실화에 닮아 있지만 도대체 옷을 벗지 않는 피사체들 힐끗 눈 흘겨보는 그이의 우편함 희미한 불빛에 묻어 나오는 정체 모를 소리..

한줄 詩 2021.06.08

내 안에 봉인된 삶이 있다 - 박남준

내 안에 봉인된 삶이 있다 - 박남준 마당 앞 울타리 위 죽은 매화나무와 때죽나무 긴 그늘을 베어 세운 작은 솟대 새의 몸이었던 푸른 나이를 기억하므로 노래에 가닿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그의 사랑과 죽음 슬픔과 기쁨 또한 몸에 들여놓는 것이리 내 안에 봉인된 전생이 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겠다 내가 새의 이전을 알고 있듯이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걷는사람 말뚝과 반란 - 박남준 고정되어 있는 운명이 있다 누군가 다가와 그의 목에 닻줄을 매고 묶어 놓기를 기다리는 그렇게 해야만 목숨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바닷가 움직일 수 없는 말뚝 너머 물이 들고 물이 난다 닻줄의 시선으로 눈어림을 적신다 한 번쯤 저 말뚝 송두리째 해일을 꿈꾸었을까 세상의 어느 바닷가 포구에 흔한 말뚝이 외..

한줄 詩 2021.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