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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취향 - 정선희

안개의 취향 - 정선희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 때문이야, 당신은 실망한 듯 말했고 먼 곳이 더 잘 보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나의 체온이 당신의 지표면보다 차가운 경우 물방울이 당신의 심중 어딘가에 맺혀 시야가 흐릿해지는 현상 나와 당신 관계 그런 말은 몰라도 좋아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영혼의 매개체, 뭐 그런 말도 말고 내가 배롱나무에 붉은 전세를 들거나 이런 말이 이해가 되는 편이지 알고 있지만 모르는 이야기 나는 좀 모호한 것들이 좋아 내가 꽃이나 나비가 되기도 하고 안은 밖이 되기도 하는 무엇보다도 안개 때문에 나는 통유리인 당신을 넘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환상통 - 정선희 그는 낮게 풀처럼 앉아 기타를..

한줄 詩 2021.06.03

우리는 서로에게 낱장으로 기억되고 - 박순호

우리는 서로에게 낱장으로 기억되고 - 박순호 ​ 몇 장 남지 않은 달력과 며칠이면 완성된다는 말 당신은 캄캄한 골목을 오가며 끼어들다 지치고 비공식적인 만남을 주선하듯 그 자리를 빙그르르 맴돈다 바람에 그을린 생각들도 낱장으로 뜯겨져 나간다 문득 눈이 부셨고 불 냄새를 맡았다 타다 남은 조각들을 누가 맞출 수 있는가 그을음 속에서 채굴되는 무늬를 누가 설명할 수 있는가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나는 밀실처럼 어둡다 그리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불탄 자리 곳곳에서 쐐기 모양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뚜렷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거룩한 일상에 참여했던 계절은 사그라졌어도 나의 전체가 반으로 뭉개졌어도 저편의 들여다볼 수 있게끔 구름다리를 놓아줄 텐가 밥보다 더 소중한 것을 내어줄 텐가 내게 명자꽃처럼 와줄 텐가 언..

한줄 詩 2021.06.02

길 위의 잠 - 전인식

길 위의 잠 - 전인식 밤이면 내 몸은 동그랗게 말린다 마른 몸에 찾아들기 좋아하는 찬바람을 그리운 사람으로 껴안고 아무렇게나 드러눕는다 내 몸 보기 흉하고 망측스러워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잠을 자는 나 꿈속에선 아흔아홉 칸 영혼의 집을 짓기도 한다 그 옛날 사람들 마음의 열반을 위해 산천을 떠돌았듯 가는 곳이 길이고 눕는 곳이 집인 이 도시 기슭 무량무량 떠돌기로 마음을 바꾸고 나니 하늘 푸르고 햇살 눈부시다 집 걱정에 자식 걱정 근심 많은 사람들 금리와 주식에 예민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아무렇게나 먹고 자는 삶의 즐거움을 가지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어렵다는 열반은 오로지 몸 똥아리 하나로만 이룰 수 있는 것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 불교문예 호박꽃에는 - 전인식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며 한 철 ..

한줄 詩 2021.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