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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구름 - 최준

유월의 구름 - 최준 흙먼지 뒤집어쓰고도 하얗게, 환하게 웃던 아까시꽃이 너무 눈부셨을까 길이 피를 더렵혔다고 이제 그만 객석에서 일어서야 한다고 극장 뒷문으로 공기처럼 조용히 사라지던 그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스크린에서 계속되는 도살 관객들은 너무 잔혹하다며 아우성이었는데 어떤 매몰지도 그를 기다리지 않아 소리 없는 세계로 가고자 했던 걸까 나이가 서른 살이었던 건 그가 이십 대의 산맥을 지나왔다는 것 모든 소멸을 무사히 버텨냈다는 것, 그러니 자 이제 어디로 간다? 복수로 무거워진 배를 끌어안고서는 복수를 꿈꿀 노릇도 이미 아니었는데 총도 아니고 칼도 아닌 말씀으로 내일을 예언하던 일기예보 믿지 못하고 멈출 수도 없어 그는 허공에 발을 내딛기로 했다 내 귀가 너무 커져서 그래 옥상을 긋고 지나..

한줄 詩 2021.06.22

현수막의 궁금증 - 고태관

현수막의 궁금증 - 고태관 언제 다 마를까 비에 젖은 글자가 비스듬하게 번진다 소액대출이자없는행복을붙잡으세요 하루에 한 마디씩 매달 수 있다면 스스로 내걸리는 사람도 있겠지 침묵이 되어 하루에 하나씩 묶인 줄을 풀어낸다면 되돌리고 싶은 고해성사 같을까 후회처럼 아무도 잠들지 못하는 밤 사람들은 잠든 나를 구경하러 오겠지 모두가 잠든 밤에 부스스 깨어난 나는 사람들의 헝클어진 이불을 덮어 주러 다닐 거야 하루에 한 명씩 죽어야 한다면 다음 날 한 명씩 살릴 수 있다면 어제 죽은 내가 오늘 살아날 수 있을까 기회의땅으로아메리칸드림미국워킹홀리데이 떠난 사람은 내 차례가 왔다고 기뻐할까 도착한 곳에서 먼저 떠나온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돌아온 사람은 보고 싶은 사람을 찾지만 떠나고 없다 길을 나선 사람과 돌아오..

한줄 詩 2021.06.21

눈물이 나오는 순서 - 김태완

눈물이 나오는 순서 - 김태완 늙은 엄니가 운다 늙은 엄니 고개 떨구고 온몸을 바닥에 내려놓고 숨죽여 운다 엄니는 늘 그렇게 울었다 슬프고 절망스러울 때,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을 때, 믿었던 내가 엄니 가슴에 못질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엄니는 늘 그런 모습으로 주저앉아 모든 슬픔을 엄니 탓으로 만들었다 늙은 엄니가 나 땜에 운다 어릴 적 보아왔던 그 모습으로 숨죽여 운다 이제는 다 큰 자식 놈 눈치보며 성치 않은 몸 예전보다 더 크게 내려놓고 작은 체구 녹아내린 눈사람처럼 온몸의 상처를 끌어안고 엄니가 운다 늙은 엄니가 흘리는 눈물이 주름을 타고 덜컹거리며 바닥에 떨어진다 늙은 엄니는 나 땜에 울고 나는 아직도 나 땜에 운다 내가 나 땜에 우는 동안 엄니는 남 같은 자식 위해 조심스레 달구어진 ..

한줄 詩 2021.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