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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 박은영

여름방학 - 박은영 어린 새가 전깃줄에 앉아 허공을 주시한다 한참을 골똘하더니 중심을 잃고서 불안한 오늘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나의 비행은 어두운 뒤에서 이루어졌다 학교 뒷산, 농협 창고 뒤, 극장 뒷골목 불을 켜지 않은 뒤편은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뒤보다 앞이 캄캄하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백열등을 깨고 담배연기 자욱한 친구의 자취방을 박차고 나온 날, 전깃줄에 걸린 별 하나가 등을 쪼아 댔다 숙제 같은 슬픔이 감전된 듯 저릿하게 퍼지는 개학 전날 밤, 밀린 일기보다 갈겨 쓸 날들이 무겁다는 걸 알았다 새가 날 수 있는 건 날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 속의 무게를 훌훌 털어 버리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게 날갯짓이라면 모든 결심은 비상하다 *시집/ 우리의 피는 ..

한줄 詩 2022.07.30

장소 신파적 - 이용훈

장소 신파적 - 이용훈 산자락 온기 찾아 모여든 집들 벌어진 틈에 풀칠 걱정 잊으려 해도 근심은 달빛 쬐는 산맨치로 그림자 짙게 얼굴들 덮는다 덮는데 뿌리박는 것은 그런 것인가? 돌바위에 난생으로 긁힌 살결 달 참 밝은데 얼룩 한점 없네, 없어서 계단 내려가는 아이 거친 숨에 볼 금세 빨개지고 소학교 기억, 니은, 디귿, 리을, 미음.. 읽고 나면 그만 마쳐도 괜찮다 해서 부둣가 하루떼기 하역으로 막내새끼 시작했네 시키는 거 하라는 거 나서는 거 말리는 거 시린 거 아린 손 마디마다 후— 불년 따끔 찌르던 손은 피딱지 피어나고 지고나면 배 타고 그물 까는 어부도 해보겠다 했지 그래야만 해서 살아나는 것은 물때 맞춰 나가고 오가는 거라 했네 파도에 온몸 얻어터지니 지켜보던 보시더니 남해 바람은 만신창이로 ..

한줄 詩 2022.07.30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다 - 이윤승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다 - 이윤승 머리통이 견고한 못은 노래가 되지 못한 노래를 부르며 단련되었다 꽉 조이며 맞물리던 시간에서 못은 얼마나 단련되며 길들여졌나 흰 벽을 우듬지라 믿으며 걸어놓은 빨간 모자가 열매인 줄 알고 쪼아 먹으며 후렴구가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며 웅덩이 빗물처럼 벽안에 고여 있었다 고여 있는 물이라는 생각을 잊고 흐르는 물처럼 때로는 경전처럼 명상의 자세로 앉아 있으면 벽이 창공이 될 수 있을까 자목련 서 있는 꽃밭으로 눈길이 간다 나무 어깨에 이마에 박힌 자줏빛 꽃송이들 바람이 망치질을 할 때마다 나무를 빠져나온 꽃잎들 날개를 파닥이며 새처럼 창공으로 날아간다 먼 눈빛으로 사람들이 벽이라 느낄 때 못은 꽃잎처럼 날개를 펴고 창공으로 그 너머로 마음껏 날아가고 있는..

한줄 詩 2022.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