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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기억 - 함명춘

아주 오래된 기억 - 함명춘 바람 불면 바람 부는 쪽으로 풍애마을 한쪽 발을 지그 밟고 서있는 느티나무의 가지가 힘없이 기울어지곤 하였다 태양의 억센 팔뚝 안에서 월척같이 뛰어오르는 여름 마을 사람들은 비가 내리기만을 손꼽아 고대했지만 늘 하늘은 굳게 입술을 다물고 기다림의 가지 끝에선 맑은 피 대신 누런 고름이 새어 나왔다 마른 장작개비처럼 갈라진 전답들이 쉬 오지 않는 잠 근처까지 떠밀려 왔다 떠밀려 갔다 몇 평의 그늘을 일구며 바짝 푸른 허리띠를 졸라매는 물오리나무 숲 자꾸만 잔뿌리들은 죽음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책보다 배고픔이 더 가득 들어찬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피라미같이 쏟아져 내려가는 하굣길을 따라 무작정 싱경한 열여덟 열아홉 살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어둠의 발자국 소리가 되어..

한줄 詩 2021.07.05

울음의 두께 - 이서린

울음의 두께 - 이서린 아직 태어나지 못한 울음이 있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이 검고 어두운 바람 소리로 창을 닫아도 커튼을 내려도 사방에서 밀고 들어와 몸을 빨아들이는 울음이 있다 여덟 살의 머리 위로 해는 넘어가고 사람을 삼킨 기차는 길게 울었다 밤길을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기어이 대문에 걸려 흔들리던 조등의 불빛, 각혈 자국 선명한 수돗가엔 빨다 만 옷가지가 흩어졌었다 치자꽃 향기 울컥 몰려 오던 밤의 교정에서 끝내 귀신으로 한 번 보았던 사람, 핏물 어린 입술 깨물며 술잔을 치고 무덤에서 불렀던 이름도 있다 굽은 골목 더듬더듬 손전등도 없이 훌쩍이며 헤어진 길을 뒤짚어 간 시간은 아직 거기 있을까, 세상의 난간에서 펄럭이다 펄럭이다 찢어진 깃발은 그 밤마다 잠들지 못한 짐승이 있다 어쩌면 차마 눈감지..

한줄 詩 2021.07.04

두 자리 - 천양희

두 자리 - 천양희 스스로 속지 않겠다는 마음이 산을 보는 마음이라면 스스로 비우겠다는 마음이 물을 보는 마음일 거라 생각하는데 들을 보는 마음이 산도 물도 아닌 것이 참으로 좋다 살아 있는 서명 같고 말의 축포 같은 참 그것은 너무 많은 마음이니 붉은 꽃처럼 뜨거운 시절을 붉게 피어 견딘다 서로가 견딘 자리는 크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일상의 기적 - 천양희 갈 길은 먼데 무릎에다 인공관절을 넣고 지팡이는 외로 짚고 터벅터벅 서울 사막을 걸어갈 때 울지 않아도 눈이 젖어 있는 낙타처럼 내 발끝도 젖는다 갈 데까지 걸어봐야지 걸을 수 있는 만큼은 가봐야지 요즈음의 내 기적은 이 길에서 저 사잇길로 나아가는 것 딱 한걸음만 옮기고 싶은 고비에서 주저앉고 말았을 때 꿇었던 뒤에도 서서 걸었던 자국 ..

한줄 詩 2021.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