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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자세 - 정선희

간결한 자세 - 정선희 하늘이 맑아 한바탕 잘 울었다 날카로운 햇살에 옆구리를 찔린 난간이 드러났다 비로소 난간의 방치된 만큼 공손해진 그늘을 본다 가계부에서 해석할 수 없는 슬픔의 구석을 지우고 밤과 낮의 궤도를 돌아온 뒷걸음의 목록을 다시 쓴다 사거리에서 몇 십 년째 목격자의 행방을 묻는 바람은 여전히 흩어지는 플래카드의 윤곽을 붙잡는다 수직으로 움직이는 편향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들의 세상은 오른쪽과 왼쪽을 조율한다 오른쪽을 맞추면 왼쪽이 왼쪽을 맞추면 오른쪽이 문득문득, 운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우리들의 인당 - 정선희 대나무 꽂힌 집에 가면 인당의 밝기를 보고 그 사람의 운명을 혹은 꽃이 떨어지는 방향을 알아맞힌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그곳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

한줄 詩 2021.07.07

눈물 혹은 장마 - 피재현

눈물 혹은 장마 - 피재현 한 줌의 바람이 불어 왔다 장마 중이었다 한 뼘의 비가 바람 속에 들어 있다 다행이 장마 중이었다 눈물을 뚝 뚝 떼어 -마치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속으로 수제비 반죽을 떼어 던지듯이- 허공 중에 던졌다 이제 공복의 허기를 채우고 일 하러 가리라 차양으로 가려진 하늘을 힐끗 쳐다보는 순간 수제비처럼 생긴 새들이 수직상승하고 있다 날개의 더운 물기를 허공 중에 털어냈다 장마 중이었다 다행히 장마 중이었다 *시집, 우는 시간, 애지출판 내가 지상에서 - 피재현 때묻은 옷을 빨아 말리며 유월의 볕이란 참 대단한 정열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바람 한 점 도움 없이 천공의 물기를 빨아 뱉어내는 흡입의 힘이란 내가 지상에 살면서 때로 우체국이나 기상관측대의 옥상에 펄럭이는 깃발이 되고 싶어 했..

한줄 詩 2021.07.06

자두 - 김유미

자두 - 김유미 어디서부터 붉어졌을까 식구들은 돌아오지 않고 그림자는 서쪽까지 자라난다 문을 사이에 두고 아이는 모자를 잠재우고 새는 구름의 모서리를 파헤친다 노을이 제 눈의 혈관을 가리킬 때 어둠은 아이의 눈물 자국을 닦는다 자두라는 관습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 전해지는 맛들 제 발길에 걸려 넘어지는 고양이의 울음, 이물감을 쏟아 내는 수도, 나뭇가지에 걸린 다문 입, 인형의 머리에서 빗질되는 허공 구구단을 외울 때 불어난 틈들이 바람의 처마 아래에 쌓인다 닫을 때 포옹하고 열 때 경고하는 것처럼 삐걱대는 소리는 오래된 정의 울음을 삼키면 물러지는 나무가 생겼다 온몸이 붉어지는 생들이 세상의 뒷문에서 첫발을 떼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동안 저녁은 길을 잃은 자들의 숨결로 ..

한줄 詩 2021.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