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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 윤의섭

이후 - 윤의섭 오늘까지는 꿈이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유골단지 지난 번 갖다 놓은 꽃에 생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건 같이 기억할 수 있다는 가능성 너라는 꿈을 꾼 것이다 운중로라고 쓰인 길에 들어서면서 한 번은 다시 오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주인이 바뀌었지만 식당에선 익숙한 저녁밥 냄새가 나고 천년 궤적을 따라 줄 지어 날아가는 새들 눈을 감으면 세상의 모든 태양이 차례로 지고 구름 속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모두 구름 속으로 착륙하는 동시의 기억 오늘부터는 처음 부는 바람과 처음 생긴 빗방울 사이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유골단지가 잠들어 있다 누구였을까 꿈이 다 지워진 것만 생생하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그 후 - 윤의섭 오늘 아침은 깨진 조각 나는 파편에서 눈을..

한줄 詩 2021.07.12

역병이 도는 여름 - 이상국

역병이 도는 여름 - 이상국 역병이 도는 여름 이웃집 백일홍이 피자 동네가 환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피해 다니든 말든 때가 되면 꽃은 사정없이 핀다. 꽃은 사람에게 겁먹지 않는다. 사랑하지도 않는다. 저 자신으로 꽃일 뿐, 저들도 병들고 아플 때가 있겠지만 꽃은 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얼굴을 가리고 벌 받은 것처럼 조용한 여름 백일홍 꽃숭어리들이 바이러스처럼 붉다.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 복날 생각 혹은 다리 밑 - 이상국 아직도 복(伏)이 되면 다리 밑이 그립다. 어렸을 적 같으면 동네 사람들과 똥개 한마리 앞세우고 솥단지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던 곳 지금은 고향에도 모르는 사람들이 산다. 이제 개 추렴 같은 건 너무 촌스럽고 또 반문화적인데다가 다리도 차가 지나가면 무..

한줄 詩 2021.07.12

승화원에서 - 손병걸

승화원에서 - 손병걸 서해가 빤히 보이는 모텔에서 발견된 막노동꾼 동생이 누운 목관이 입술을 앙다문 형제자매들을 지나 화구 속 불길로 빨려 들어간다 죽음의 완결을 호명하는 전광판 숫자만큼 승화원 창밖에도 어제의 일몰을 닮은 흰 구름들 다시 한껏 붉은데 돛대도 삿대도 없이 머나먼 길을 나선 동생은 어떻게 아침을 맞이할까 뜨거운 뼛가루 손에 움켜쥔 채 형제자매들 차마 손을 펴지 못하고 분향소 곁 계수나무 위 새들도 가느다란 가지를 꽉 움켜쥔 채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높고 긴 굴뚝 위로 굵은 연기가 망망한 허공에 길 한 가닥을 놓아줄 때 그제야 노을빛 눈동자들 하나둘 입을 모아 즐겨 부르던 동생의 노래 가사를 밤하늘 한복판에 마디마디 새긴다 일렁이는 소절들 범람하듯 환하게 흐른다 하얀 쪽배에 동생을 싣..

한줄 詩 2021.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