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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사는 행복한 사내 - 홍성식

노량진 사는 행복한 사내 - 홍성식 강에서 바닷고기의 비린내가 온다 어둠 깔리는 수산시장이 생선의 배를 갈라 새끼의 배를 불리는 사내들 악다구니로 끓는다 보기에도 현란한 사시미칼 서슬 아래 펄떡이는 생명 내장 쏟으며 쓰러지지만 서른아홉 대머리 박씨에겐 죄가 없고 죄 없으니 은나라 주왕도 안 무섭다 허풍과 농지거리 섞어 서푼짜리 생 헐값 떨이에 거래하는 고무장화의 거친 사내들 파르르 떨어대는 넙치 아가미에선 '과르니에리 델 제수' 소리가 난다 그래, 오늘만 같다면 이번 달 딸아이 레슨비는 걱정 턴다 새까만 박씨 낯짝 전갱이 굵은 비늘이 빛난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대게잡이 선원 철구 씨 - 홍성식 당 45세 철구 씨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간다 여기서 구하지 못한 아내 거기라고 쉬이 찾아질까 성..

한줄 詩 2021.09.11

어느 날 벼랑이 - 이은심

어느 날 벼랑이 - 이은심 우리가 서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외지고 혹독해진다면 저 높이는 흉측한 돌일 뿐이지 거기서 우리 중 한 사람이 몹시 울어야 한다면 천 길 깊이는 나쁜 신념일 뿐이지 제발 희생을 실천해주세요 아찔함을 뛰어내려주세요 불처럼 단단한 눈물이 되어볼 걸 해뜨기 전에 길을 나선 내상(內傷)이 피운 우리는 문득 몰매처럼 서러운 불안의 아들딸 그러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이번 생의 경사는 낡은 슬리퍼처럼 헐떡이지 우리를 보다가 우리만 보다가 아무 데나 침을 뱉는 잠깐의 미망이 닿지 않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꽃, 꽃을 지켜보는 난폭 여긴 뜨겁고 좁은 맹지가 될까 우리 몰래 갈라 터진 몸을 실천해주세요 헛꽃의 걸음이 더딘들 멈추지 말아 주세요 아래로 아래로 자라는 우린 방자한 기백인 걸요 아슬하고 비범..

한줄 詩 2021.09.11

차꽃 앞에 놓는다 - 박남준

차꽃 앞에 놓는다 - 박남준 겸손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꽃이 있다 순결하다는 말이 그 곁에 미소를 머금고 살며시 배어 있는 꽃이 있다 그리하여 곱기도 곱구나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아미 숙인 수줍음이 뒤따라 나오는 꽃이 있다 첫사랑을 고백하던 그 떨림 같은 꽃이라니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도 부끄러웠을까 꼭 그만큼 숨은 듯 다소곳이 너는 피었구나 그윽하여라 첫눈처럼 내렸구나 꽃송이 눈꽃송이 함박눈처럼 소복소복 소담하게도 너는 피어나서 달빛과 별의 향기 길어 올렸으리 서리서리 서리를 펼쳐 놓는 밤이나 날리는 눈보라 아랑곳하지 않다니 고요하여라 세상의 단아하고 고혹한 시어들을 노란 가을 햇살의 꽃술 속에 안고 품었구나 일찍이 어떤 꽃의 수사가 하마 이러할까 네 앞에 나를 기꺼이 내어놓는다 *시..

한줄 詩 2021.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