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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잉여 - 조기조

가난의 잉여 - 조기조 중년이 되면서 연이어 허리띠 구멍을 늘이고 목 단추를 끼우기 힘들 정도로 군살이 늘어 은근히 걱정이다 살아오는 내내 가난했는데 중년에 느는 군살을 보며 필요한 양보다 많이 먹은 몸을 보며 가난조차 잉여였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고도 남는 것을 위해 싸우지 말자던 생각이나 미래를 위해 쌓아두지 말자던 거침없는 주장을 되새김질한다 가난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는 중년의 잉여가 똑바로 걷고자 해도 뒤뚱거리게 한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욕망의 무게 - 조기조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서 무언가를 버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이나 동기간도 일부러 덜 만났다 시위가 있는 광장에 나가도 먼발치에서 서성이거나 글쟁이들과 될수록 어울리지 않았다 혹하지 않아야 한다는 나이..

한줄 詩 2021.09.26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 박남원 시집

아파트가 주된 주거 형태로 자리하면서 골목과 마당이 사라지고 있다. 가물가물하지만 내 어릴 적 살던 집은 허름한 초가였다. 마당 모퉁이에 장독대가 있고 한 켠에는 늙은 감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누렁이와 장난을 치다 감나무 그늘에서 함께 낮잠을 자기도 했다. 바지랑대를 아는가. 지금이야 세탁기와 건조기를 거치면 편하게 빨래를 하는 시대지만 예전에는 빨래도 노동이었다. 어머니는 빨래터에서 빨아온 옷들을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었다. 물기 머금은 빨래 무게 때문에 빨랫줄이 축 처진다. 이때 빨랫줄 중간쯤에 세워 축 늘어진 줄을 받쳐주는 바지랑대가 필요하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어릴 적 마당에 서 있던 바지랑대가 생각났다. 황폐해진 내 마음을 바지랑대처럼 받쳐준 시집이기 때문이다. 물이 ..

네줄 冊 2021.09.23

그 나이쯤 되면 - 최준

그 나이쯤 되면 - 최준 아닌지, 문득 곁눈질로라도 어둠이 그리우면 몸이 쇠했다는 증거 누구나 그 나이쯤 되면 혼자 가게 되는 것 아닌가 그만큼 했으면 싸움질도 싫증이 나고 거친 숨과 뜨거운 몸도 식힐 줄 알지 않는가 열어놓은 마음 문틈으로 얼비치는 죽음 그림자 그걸 모시느라 여기까지 당도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는가 고통하며 세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세월 속에 무너내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가 누구나 그런 죽음의 몸종으로 한세상 살아왔음을 아는 것 아닌가 길은 늘 생애보다 길게 마련인 것 그 길 도중에서 나 죽으면 눈 귀 어두워지면 남겨진 길로는 몸 떠난 마음만 갈 일인 것을 마음만 자욱히 운무에 헤매일 것을 그런 어둠 속으로 몸 끄느라 지친 마음만 죽음을 죽도록 그리워하는 것을, 그런 때 곁을 질러가는 ..

한줄 詩 2021.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