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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 육근상

한낮 - 육근상 대밭에 흰 새 울다 날아갔다 천둥 번개 불러들인 대추나무도 슬퍼하였다 강 마을 들어서는 샛길은 또랑 만들어 며칠 수근거렸다 땡볕이 채마밭에 날개짓 털었다 마루턱 기대 댓잎이 쓰는 글 몇 줄 읽다 받아쓸 요량으로 고쳐 앉으면 풀잎은 강물 소리로 흔들리다 울음 터뜨렸다 마루가 걸을 때마다 슬픈 노래로 찌걱거리자 고욤나무가 주렁주렁 매달린 그늘 뒤란에 뿌려놓았다 마당이 바람도 없는 한낮이라 눈부시게 적막하였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볕 - 육근상 품속 같다 무엇이든 끌어안고 있으면 한 생명 얻을 수 있겠다 겨우내 버려두었던 텃밭도 품속 따뜻했는지 연두가 기지개다 뽀족한 입술 가진 호미도 헛바닥 넓은 꽃삽도 품속 그리웠는지 입술 묻고 뗄 줄 모른다 나를 품었던 엄니도 이제 품속 돌아가려는지 양..

한줄 詩 2021.09.27

먼저 된 사람 - 김한규

먼저 된 사람 - 김한규 형은 먼저 형이 되었다 마마가 어린 몸을 먼저 지나갔다 남겨진 자국에 죽어 갈 날이 하루씩 파고들었다 동생은 형의 동생이 아니라고 했다 아랫목에서 식고 있는 밥그릇이 넘어지고 먼저 될 수밖에 없었던 형은 눈이 파묻은 취한 발을 끌며 집으로 오고 있었다 기미가 없는 봄이 꺼멓게 멍든 뼈를 드러냈다 얼어붙은 발은 끝까지 팔을 움켜쥐고 기다리지 않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얼마 남지 않은 날에 파먹을 수 있는 것은 다 파먹고 달력도 없이 넘어가는 얼굴을 벽 속에 묻었다 먼저 되고 만 사람이 버스에 올랐다 거두는 눈길을 먼저 거두었다 다 거둔 얼굴에 죽은 새의 날개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동생은 형의 동생이 아니었으면 좋았다 눈과 함께 어서 가 버리는 이월이었으면 좋았다 다시 ..

한줄 詩 2021.09.27

마스크에 쓴 시 4 - 김선우

마스크에 쓴 시 4 - 김선우 ​ 두껍습니다 이 밤은 유독 내 몫이 아니었던 생들이 무더기로 돋아 방 한칸의 벽을 이룬 듯한 이 밤은 뚫고 나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우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우리여 우리는 일상을 회복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일상은 폭력없이 평화로웠나요? 차별없이 따뜻했나요?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너희가 어른이 되면"이라고 말할 수 있었나요? 우리 손으로 미래를 목 조르고 있지는 않았나요? 내 손이 판 무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마스크에 쓴 시 13 - 김선우 1 어쩔 수 없이 빌린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빌려 쓸 수밖에 없는데 돌려줄 수 없어서 존재의 슬픔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들이. 실은, 함부로 빼앗은 것들이 더 많습니다. 이..

한줄 詩 2021.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