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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달의 백서 1 - 이문재 -그래서 달은 둥글어진다 지금 저기 ..

한줄 詩 2021.09.19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 안태현 시집

안태현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냈다. 2011년에 으로 등단했으니 올해 딱 10년 차다. 2015년에 첫 시집을 내고 세 번째 시집이니 부지런히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시가 느슨하거나 허술한 것 없이 탄탄하고 어려운 낱말 없이도 긴 울림을 준다. 한 사람에 꽂히면 단물이 빠질 때까지 주구장창 만나는 편인데 시인도 마찬가지다. 이 시인에게 제대로 꽂혀 나오는 시집마다 집중해서 읽는다. 발로 쓰든 엉덩이로 쓰든 가슴으로 쓰든 간에 시에는 그 시인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의 사춘기 적 체험을 발견할 수 있다. 연작시로 세 편씩 실린 과 이다. 열 여섯 살에 취업한 영등포 지하다방은 시인의 첫 직장이었다. 바람 한 점, 햇빛 한 점 없는 이곳을 시인은 적멸보궁이라 칭한다. 김 양이나 ..

네줄 冊 2021.09.18

저문 들녘의 꽃들을 위하여 - 박남원

저문 들녘의 꽃들을 위하여 - 박남원 꽃들이 핀 저문 들녘에 서면 바람은 시든 추억의 재가 되어 돌아온다. 젊은 날 꿈을 찾아 멀리 날아갔던 새들은 기억조차 가물거리고 나는 저문 들녘의 꽃길을 걷는다. 대낮부터 햇빛과 흰 구름과 따듯한 공기에 한껏 향연을 베풀다가는 어둠이 온 무렵에서야 겨우 꽃들은 자신의 길을 내게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손짓을 받아들인다. 아쩌면 지금 저 꽃들은 나보다 더 슬픈 기억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의 마을 귀퉁이에선 언제나 푸른 꿈들이 어둠 속에 저물어가고 한 모금 목마름의 물조차 야속했던 혹은 운명과도 같은 시간들. 그래서 꽃은 미처 꽃이 되지 못한 것들에게 조그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세상에 환한 것들은 생을 살아오는 동안 한 번쯤 아픈 ..

한줄 詩 2021.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