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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개 - 강시현

비로소 개 - 강시현 말로만 듣던 깍쟁이가 따로 없었다 아내의 벗이 여행 간 사이 며칠 맡아 달라고 보낸 그 녀석에게는 싱그럽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사람보다 더 비싼 이발을 하고 예방접종을 받고 더 자주 목욕하고 붙임성도 있다니 말쑥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은근히 경계심도 돋았다 몰티즈니 푸들이니 치와와니 하는 억세게 운 좋은 견공들은 고상하게 먹고 자고 똥 싸고 산단다 검둥이는 그늘이 흘러내리는 슬레이트 처마 밑에서 컹컹 짖으며 사람 똥도 먹고 마을 어귀에서 흘레도 붙다가 한여름 개장수에게 다리가 꺾인 채로 팔려 나갔다 그 돈으로 육성회비를 내고 공책도 샀다 검둥이는 문풍지처럼 떨며 가부좌를 틀고 떠났다 그 후로 습관성 탈골처럼 어떻게든 꺾인 활자를 읽으면 나는 몹시 아팠다 땀에 전 몸뚱아리와 생존에 밀려..

한줄 詩 2022.08.20

아내의 사촌에게 - 박판식

아내의 사촌에게 - 박판식 안 되는 것들에게 나는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얼음덩어리 같은 후회가 구덩이를 팠습니다 내 두 손이 나의 두 발이 그리워 복숭아뼈를 만졌습니다 허망한 것들이 비가 되어 내리다가 눈이 되어 흩날리더군요 호랑이, 호랑이들은 대개가 미남 미녀입니다 홍콩이라는 제목의 책을 다 읽고 뉴욕과 런던마저 정독하고 나서 실컷 울었습니다 슬픈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어서 더 슬펐습니다 불행은 모두 현찰로 지불해야 한다고 불행을 만들다가 지친 아내의 사촌이 오늘은 슬픈 얼굴로 가정식 떡볶이를 만들어 줍니다 나이 마흔에 '나는 귀여운 아빠 딸' 티셔츠를 입고는 뭔가 미련을 못 버린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습니다 희망을 버려라 결심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결심입니다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

한줄 詩 2022.08.19

오래된 세균 - 조숙

오래된 세균 - 조숙 세계가 위험할수록 안전한 것을 찾는 비루한 하루 세균이 밀가루를 먹고 변화시킨 발효빵 효모가 쌀을 먹고 만들어낸 막걸리 시간을 오래 들여 세균이 남긴 것을 얻어먹는다 바이러스 매개체 인간이 되어 집안에 갇힌 채 효모가 먹걸리 만드는 소리를 들으면 속도와 팽창으로 무리 지어 내달리던 시간은 천천히 발효되어 생각 속으로 들어오고 오래된 세균처럼 무언가를 변화시켜 안전하게 하는 것 배 불리기 위해 비루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런 것을 꿈꾸게 된다 *시집/ 문어의 사생활/ 연두출판사 몸 - 조숙 나이들수록 내 몸이 좋다 몸은 아직 움직이고 있다 몇 군데 원할하지 않지만 혼자 움직일 수 있다 아직은 따뜻하다 멀리 갈 수 있다 바람을 느끼고 걸을 수 있다 피부로 햇볕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먹고 ..

한줄 詩 2022.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