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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 뒤 나그네들 - 홍신선

처서 뒤 나그네들 - 홍신선 영락없이 일모도원(日暮途遠) 황망한 나그네의 몰골이다. 처서 지나 뭇풀들이 색을 바꾼 궂은 잎 몇몇 매달고 갓 난 몸 겨드랑이에다 손톱만 한 꽃을 감추거나 이삭들 목을 뽑아 올린다. 이 얼마나 앙증맞은 절망의 기색들인지. 아니다. 이 얼마나 번식욕이 마려운 진지한 얼굴들인지. 차마 저들을 어찌할 수 없어 나는 왼종일 터앝에 와서 귀청 해진 내 귓때기나 내려놓는다 가승(家乘)에 무후(無後)다란 기록 한 줄 지우고 뭉개기 위해 인간도 생명에 된힘에 된힘을 더하지 않는가. 목숨붙이들 누구나 뒷날 세대를 노둣돌 삼아 시간의 텅 빈 통로를 뚜벅뚜벅 걷거나 건너뛰어 영원에 당도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 무한 미래를 위해 영근 종자들 속 어딘가 오고 있는 풋내기 나그네들 발소리를 오늘은 이..

한줄 詩 2022.08.25

나보다 먼저 떠나는 나를 보내는 일 - 김재덕

나보다 먼저 떠나는 나를 보내는 일 - 김재덕 어금니 하나를 또 뽑았습니다. 오래 흔들리던 놈 아프게 버티다 슬그머니 뿌리를 놓더군요. 지난 몇 년 열 몇 개 시간이 뽑히고 볼트가 박혔습니다. 지나간 사랑처럼 몇몇의 내가 가고 녹슬지 않는 타인이 나를 지키는 셈이지요. 어금니들은 내 손으로 다 뽑았습니다. 아픔을 진통제로 달래고 기다리다 제 발로 일어설 때 헤어졌지요. 헤어지니 아픔도 사라졌지만 떠난 자리는 늘 깊더군요. 오래 참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싶었습니다. 작약 몇 송이 저뭅니다. 붉은 잎 이지러지고 발 아래 먼저 떠난 봄들 낭자하네요. 다들 그렇게 떠나나 봅니다. 단단한 것들을 앞세워 보내며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갑니다. 먼저 떠난 것들이 조금씩 떠나오는 나를 보겠죠. 단단한 눈빛으로. 떠..

한줄 詩 2022.08.23

나는 잘 있습니다 - 하상만

나는 잘 있습니다 - 하상만 내가 쓴 글을 내가 읽고 내가 부른 노래를 녹음해서 듣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걸 여태 모르고 밖으로 나돌았다 혼자 있지 않아서 쓸쓸했던 거구나 혼자 있지 않아서 외로웠던 거구나 내가 쓴 글을 내가 읽고 내가 부른 노래를 다시 듣는다 혼자라서 행복하구나 *시집/ 추워서 너희를 불렀다/ 걷는사람 그분은 외로웠을 거예요 - 하상만 죽는 게 왜 두려울까 물었더니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네요. 매일 매일 살아본 경험만 있고, 죽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이상하게 살수록 살고 싶어져요. 그러다 보니 다시 한번 태어나 보고 싶기도 하고. I born이 아니라 I was born입니다. 태어난 게 아니고 태어나진 겁니다. 태어났다고 하니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책임이..

한줄 詩 2022.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