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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여인숙 - 석정미

대광여인숙 - 석정미 -꼽추 아저씨 유난히 지렁이가 많던 골목 햇볕은 따갑고 얇은 살 속으로 모래가 박혔다 꼽추에 난쟁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손수레, 좀약, 까만 고무줄 실은 세상에 필요한 슬픈 것들 사람들은 슬픔인 줄 알면서 골라 갔다 바닥을 끄는 지렁이 길 침을 뱉고 지나갔고 땡볕에 붉어지는 등 밟혀도 낮은 길뿐 저녁이면 대광여인숙 낡은 지붕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에 파란 소주병이 기울고 꿈길처럼 밀려오는 모서리 저녁노을 꼽추 아저씨도 세상의 지렁이도 날개가 없어 슬펐던 날들 밤이 오면 대광여인숙 간판에 백열등이 켜진다. *시집/ 대광여인숙/ 어린왕자 대광여인숙 - 석정미 -앉은뱅이책상 작은 도랑을 하나 끼고 검은 통로 어둡고 긴 자취방 키만큼의 공간만 허락해 연탄불로 온기 나누던 방죽처럼 길쭉한 직..

한줄 詩 2021.12.27

택배 - 최규환

택배 - 최규환 파업이 끝났고 눈을 밝게 비춰줄 스탠드가 도착했다 삶에 대한 밝은 이해가 필요했던 것인데 상자를 놓고 간 그에 대한 이해는 파업이 끝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기슭에서 보내온 늙은 어미의 편지 혹은 잠든 아이를 뉘이며 막차가 끊어지기 전 돌아오겠다던 마음이 혹은 깡마른 놈과 눈이 맞아 짐을 싼 아내를 포기해버린 또는 고독사를 준비하며 남은 며칠을 더 살고 있을 아니면 치솟는 집값에 사랑을 포기한 청춘이었을 그런 택배 절체절명의 속속들을 문 앞에 두고 간 통로엔 바람이 서성거렸고 파업은 끝났으나 기한 없는 삶으로 인해 빈 상자의 여운과 마주하는 기막힌 이 시대의 허기 나는 조금 더 두툼하게 스탠드 밝기를 조절한 후 별수 없이 간격 사이에 허망한 그림자를 앉혔다 *시집/ 설명할 수 ..

한줄 詩 2021.12.26

고마운 일 - 김주태

고마운 일 - 김주태 아이들이 어릴 때 이 동네로 와서 아직까지 살고 있다 이름 없는 잠바를 입고 이이들은 즐겁게 힙합을 따라 했고 가끔 먼 곳으로 떠날 꿈을 꾸다 돌아오는 날이면 집을 잃은 큰 개가 현관에 버티다 끌려갔다 또래들은 하나둘 골프장으로 가고 땅을 보러 다니고 동네 사람 반이 신축 아파트로 옮겨 갔지만 우리에겐 늘 넉넉한 저녁이 있었다 코코넛을 씹으며 딸은 누구나 가는 대학을 고르는 중이고 점심 먹고 나간 아들은 소식이 없다 아내와 나는 낡아가는 외벽처럼 아무리 닦아도 빛나지 않은 돌처럼 굳어간다 이런 것이 편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시집/ 사라지는 시간들/ 삶창 아버지 - 김주태 남의 사과밭에 들어가 익지도 않은 풋사과를 작대기로 내리치다 주인한테 들켜 개처럼 맞고 집에 오자 ..

한줄 詩 2021.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