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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이 몇 번 깜박거려도 - 이정희

행성이 몇 번 깜박거려도 - 이정희 붉은 계양대에 따개비 같은 바람이 잔뜩 붙어 있다 아무리 떼어내도 달라붙는 난폭한 바람 물밑을 알리는 부표 몇 시간을 달려온 어선들의 종착점, 어떤 파도도 물기둥에 떠 있는 아버지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중력을 만나야 무게가 생긴다는데 천적 바람과 주거니 받거니 실랑이를 벌여도 침몰하지 않는다 수평선에 더듬이를 세우고 마치 외계 같은 밀봉 속 그는 고요하다 몇 번 크게 들이마신 결심인 듯 단숨에 들이킨 심호흡같이 새어 나간 적 없는 공기가 깊고 깊은 물속을 수면 위에 올려놓고 배를 기다렸던 것이다 결심을 쉽게 풀지 않는 부표는 섬광 반짝이는 칠흑의 바다를 돌본다 물때만 끌어안는 굳건한 약속 어떤 폭풍에도 물밑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짭조름한 양수에 등을 대고 바다 안쪽의 ..

한줄 詩 2021.12.28

그 나무는 이미 - 박인식

그 나무는 이미 - 박인식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죽어 지냈기에 숨죽여 나를 죽여왔으면 보다 못해 그 나무가 먼저 죽었을까 탁- 찰나의 삶을 죽음의 영원으로 꺾어 자신의 죽음 앞에 이미 와 있었던 내 죽음으로 데려가 지옥에서 보낸 랭보의 한 철보다 어느 날 산에서 영원으로 꺾어진 내 첫사랑의 스물두 살보다 죽음에서 보낸 내 여름 한 철 *시집/ 내 죽음, 그 뒤/ 여름언덕 즐거운 오타 - 박인식 방랑보다 황당한 인생은 없다던 내 방랑인생의 황당을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다, 는 황홀로 바꿔놓고 운전면허도 차도 없이 음주운전하는 음주시인을 음유운전하는 음유시인으로 가꿔놓고 산을 첫사랑한 산벗이 산벚꽃으로 진 슬픔을 산벚꽃 산에서 지다, 로 은유하더니 이라는 이번 시집의 원제도 로 고쳐 죽음까지 살아서 즐기..

한줄 詩 2021.12.28

오늘은 밤이 온다 - 우혁 시집

갈수록 마음 가는 시집 만나기가 힘들다. 그런 와중에 눈에 번쩍 들어오는 시집을 만났다. 우혁의 첫 시집 다. 진공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이렇게 공감 가는 시집을 만나면 떨리면서 기쁘다. 내친 김에 반복해서 읽었다. 우혁 시인은 1970년 출생으로 한국외대에서 인도어를 전공했다. 인도어가 어떤 언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거대한 인구 대국 인도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삶창에서 나오는 시집은 가능한 읽으려고 하는 편인데 이 생소한 이름이 박힌 시집을 별 기대하지 않고 들췄다가 제대로 빨려 들어갔다. 우혁이라는 짧아서 외우기 힘든 이름이 본명은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이 시인을 마음에 담는다. *절벽 같은 마음으로 길을 핥아본다 나는 길의 미식가 누추하고 남루한 사연은 좀 접자 내가 닿아..

네줄 冊 2021.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