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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의 달력 - 임경남

13월의 달력 - 임경남 더는 갈 데가 없는 13월의 달력은 냉골이다 일마저 끊긴 겨울에는 말이 입안으로 말려들어가 목소리까지 증발해버린다 나는 수취인불명 식은 텔레비전은 혼자 놀고 전화기는 손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인기척이 졸아든 집에 행주는 비틀린 채 말라가고 달력의 표정은 똑같다 오래 전에 탕진해버린 젊은 날 파산한 추억은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납작하고 흔들리며 가는 독거는 갈아입을 감정이 없다 어떤 부호도 와서 같이 살지 않은 탓이다 누구에게도 번지지 못하고 봉지처럼 캄캄해지느라 희망의 패를 놓친 사적인 백산빌라는 한 켤레의 어둠을 신고 끈질기에 나를 찾아오는 것인데 *시집/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 북인 이명(耳鳴) - 임경남 이명은 빵 속에 빵이 사라진 난처함이다 뿌리는 어디에 걸어두..

한줄 詩 2021.12.29

흔한 낙타에 대한 - 김미옥

흔한 낙타에 대한 - 김미옥 햇살을 등에 꽂고 낙타가 걷는다 무심히 혀로 콧구멍을 핥는다 나는 편안히 앉아 익숙한 비애를 본다 와이드 화면 속 모래바람은 회오리치고 열 받은 팝콘은 지리멸렬 터진다 낙타는 우스꽝스럽게 울지만 눈물을 저장해 놓고 가볍게 씹는 법을 안다 단내가 화면 밖으로 품어 나온다 지긋이 눈뜬 낙타의 검은 망막에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뜨거운 혹 만년을 이고 다녀도 긴 눈썹 한번 깜빡이면 화면이 바뀐다 마른 오아시스에는 오늘도 불굴을 되새김질하는 흔한 낙타가 있다 *시집/ 탄수화물적 사랑/ 한국문연 정치적인 아버지 - 김미옥 엄마가 밥 먹으러 간 사이 병원에서 혼자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 죽음은 객사일까 아닐까 '네 엄마 얼른 오라 해라' 전화기 건네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삼팔따라지 박..

한줄 詩 2021.12.29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전혜원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사전이 그리 정의할뿐더러 현실에서도 그렇다.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에서 ‘사람의 가치’는 그가 가진 ‘노동의 가치’와 연동된다.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좌우하는 것은 개인의 노동에 매겨지는 가치(임금)다. 값비싼 노동자일수록 촉망받는 인재로, 각광받는 결혼 상대자로, 존경받는 부모로 살아가기 쉽다. 반면 노동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저임금 노동자, 나아가 실업자는 최소한의 권리와 존엄조차 누리지 못할 때가 많다. 이 책은 노동력을 사람의 가치로 환산하는 오래된 현실이 합당한지에 대해 애써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크고 머나먼 차원의 일이다. 대신에, 좋든 싫든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 일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주목한다. 요컨대 이 책은 플랫폼 노동에..

네줄 冊 2021.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