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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 지나고 며칠 이따 - 한명희

처서 지나고 며칠 이따 - 한명희 시루떡 같은 바위가 부르르 몸을 떤다 안개가 단번에 걷히고 두 개 나이 든 여자의 젖가슴 같은 능선 앞에서 머리카락 쭈뼛, 선 나는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일 삼아 먹고 있었는데 가시 돋친 침엽수 사이로 솟은 해가 바위 밑에 연신 불을 지피고 있었다 또 어떤 날엔 바위가 공원 한쪽 부서진 짱돌처럼 날아다녀서 놀란 눈퉁이는 숨을 곳을 찾는 길고양이가 되고 발톱 빠진 발등은 끈 떨어진 신발 속에 젖어 있고 또 어떤 날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는 척 학교 가는 아이들과 현관문을 나서는데 옷 갈아입느라 두고 나온 해고통지서가 생각나서 처서 지나고 며칠 이따 고사떡을 돌리던 어머니의 손으로 아버지가 불이 나도록 뺨을 때리고 있었다 *시집/ 아껴 둔 잠 / 천년의시작 룰렛 - 한명희..

한줄 詩 2022.08.28

사라진다는 것은 - 부정일

사라진다는 것은 - 부정일 왕벚나무 잔가지 태우며 뭔가 태우기를 좋아하는 나는 전생에 숯쟁인지 도가의 화공인지 모른다 부서진 고가구 태우다 오늘도 이웃에게 핀잔을 듣는다 참나무 태워 숯을 만들듯 고승의 다비가 한 줌 사리를 만들듯 사라진다는 것은 또 다른 탄생을 의미할 수도 있어 밤하늘에 별이 긴 꼬리를 사선으로 남기며 사라져도 어딘가에선 또 다른 별이 탄생해 영롱하게 빛날지니 소멸은 아름다운 것 폐목이 노무의 언 손 녹이듯 누군가 의해 나 숯이 되리라 칠순 바라보는 나이에 마지막 불꽃 피워 훗날 누군가의 불씨가 될 수 있다면 나 그것으로 족하리라 *시집/ 멍/ 한그루 빈손 - 부정일 전봇대보다 더 커버린 아름드리 야자나무가 있다 중장비 없이 옮길 수도 없는 몇 해 전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우듬지에 ..

한줄 詩 2022.08.27

폐막식 - 최백규

폐막식 - 최백규 집에 오면 죽을 마음이 사라져 있었다 집 안 가득 쌓인 그림자로 문을 막으면 여름이 온다 학기가 끝나버린 직후 네온사인이 늘어선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취한 채 갈비뼈에 손마디를 맞추다가 열이 들뜨도록 무더운 주말에는 열차가 한강의 어깨를 숨차게 쓸어내렸다 우리는 텐트에서 추운 지방의 만화책을 쌓아놓고 엎드려 있었다 나무들이 눈더미를 뒤척이는 소리를 읽으며 이마에 묻은 바람이 서녘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물바닥에 어두운 여름이 일렁였다 밴드 동아리와 얽히며 그들의 몸에서 나뭇가지 냄새를 맡을 때 혹은 앰프를 연결해 종일 바닥을 차고 울려 퍼진다든가 멍청하게 포물선을 그리는 농구공을 바라보며 환하게 소리치고 새로 산 옷을 느슨하게 풀고 해변에서 폭죽을 터뜨리다가 입을 맞추었던 파도와 멀어져가던..

한줄 詩 2022.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