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밤 - 육근상

마루안 2021. 10. 21. 21:34

 

 

가을밤 - 육근상

 

 

풀벌레 울음 가슴을 찢는 밤이다

먹감나무 이파리가 먼 길 다녀온 듯

툇마루 내려앉으며 적막을 깬다

 

나는 바람벽 비스듬히 기대어

안방 바라보는데

한숨인 듯 앓는 소리인 듯

가쁘게 몰아쉬던 숨소리도 없이

텅 빈 방이

컴컴하게 뚫어놓은 굴속 같다

 

나지막이 엄마 하고 부르니

아랫목 깔아놓은 이불이

자다 꿈을 꾼 듯

누구여 애비여 언제 들어온겨

아이고 깜짝 놀랐네

또 꿈속으로 들어간 듯 찌푸린 미간으로

고욤나무 가지 걸린 달이 노랗게 익어간다

 

나는 컴컴한 빈방 향하여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는 바람벽에서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내가 다시 엄마 하고 부르니

텃밭 풀벌레가 나를 따라 하는 듯

엄마 하고 우는 밤이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가을 - 육근상


바라보기만 해도 쨍그랑 깨질 것 같은 하늘 바라보다
함께 걷는 계족산 뱉어내는 가랑잎이라는 말 하도나 슬퍼
아 죽고 싶은 아침이로다 그런 줄 알아라 각시한테 문자 넣었다

가을은 맑고 차가운 기운으로 익어
살진 송어 떼 같은 후박나무 이파리가 자맥질하듯 차고 오르는
봉황봉 암자 들어설 무렵이었을까
내가 계곡물 손 적셔 만추의 얼굴 씻어낼 무렵이었을까
외출하려면 문간까지 따라 나와 손 흔들어 배웅하던 각시 답신 왔다

살강 밑 항아리 녹파주 익는 소리 들을 만하다 그런 줄 알아라

 

 

 

# 육근상 시인은 1960년 대전 출생으로 1991년 <삶의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절창>, <만개>, <우술 필담>, <여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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