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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뒷곁에 소를 매다 - 이은심

마음 뒷곁에 소를 매다 - 이은심 ​ 느닷없이 어두워져 한 차례 소나기 퍼붓더니 건너갈 수 없는 곳이 생겼다 소는, 거기서 운다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짖던 것들 잦아들고 믿었던 것들도 다 휩쓸려가고 소가 몰매를 맞는다 말뚝에 매인 몸이 오죽하면 눈물의 반지름을 도는 동안 작당하고 몰려와 쏟아지는 채찍을 피할 수 없는 사랑처럼 홀로 견디는 그대여 이제 젖은 마음을 뒤적이면 그 터진 잔등을 어디서 본 듯 하여라 오래 된 얼굴을 지금 막 내게로 돌리는 쓸쓸한 신(神)의 모습 용서마소서 쩌엉- 울음 끝을 뭉개는 번개 이쪽에서 혼자 늦은 점심을 먹다가 부득이 마음 뒷곁에 소를 매고 후줄근히 젖는 사람이 있다 목부가 낮잠에 빠져 꿈에 떡을 얻어먹는 잠시잠깐의 일이다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초음파 메시지..

한줄 詩 2018.04.22

큰 꽃 - 이문재

큰 꽃 - 이문재 꽃을 내려놓고 죽을 힘 다해 피워놓은 꽃들을 발치에 내려놓고 봄나무들은 짐짓 연초록이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 꽃 지고 나면 봄나무들 제 이름까지 내려놓는다. 산수유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산벚- 꽃 내려놓은 나무들은 신록일 따름 푸른 숲일 따름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 못한다. 꽃이 지면 우리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떨군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 저마다 더 큰 꽃으로 피어나는 사태를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꽃은 지지 않는다. 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 더 큰 꽃을 피워낸다. 나무는 꽃이다.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다.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낙화 - 이문재 바람 한 점 없는데 하르르- 꽃잎 하나 떨어진다...

한줄 詩 2018.04.22

꽃나무 아래가 무덤 속 같다 - 이운진

꽃나무 아래가 무덤 속 같다 - 이운진 봄볕 앞에 망설인다 목련과 산수유 바람이 잠시 쪽잠에 빠져들면 눈빛 걸어둘 곳이 없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종일 두꺼비 집을 지어 꽃잎을 숨기고 발 디디는 곳마다 후두둑 소름이 떨어진다 온몸에 열꽃을 피우며 등이 아파오고 어김없이 꽃잎 몇 장 또 부풀어 오른다 그 순간 하늘이 캄캄해진다 무성한 꽃의 안도 이러할까 헤아려 보아도 일찍 시든 꽃잎은 옛 기억이 없고 뜨거운 뼛가루만 부서진다 희고 붉은 꽃잎들 봄볕을 탓하지만 한 장도 남김없이 다 피어야 끝나는 봄날, 마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꽃나무 아래가 무덤 속 같다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문학의전당 사진기가 없던 일요일 오후 - 이운진 1 일요일 오후 수목원에는 꽃보다 사진기가 더 많다 패랭이 꽃 앞에서, ..

한줄 詩 2018.04.21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 이종형 시집

간만에 좋은 시집 하나 만났다. 며칠 전 이종형 시인이 5.18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학상 받은 시집치고 감동을 준 시집이 별로 없었던 경험 때문에 며칠 미적거리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집어들었는데 시편 하나 하나가 심금을 울린다. 이틀에 걸쳐 세 번을 반복해서 시집 전체를 읽었다. 내가 요 근래 이렇게 반복해서 읽은 시집이 있었던가. 희안하게도 읽을수록 감동이 배가 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 명료하게 들어오지 않던 시도 두 번째에서 확연하게 가슴에 박혔다. 한 사람의 일생이 시집 전체에 담겼다고 해도 될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묶은 시집임을 느꼈다. 실제 시인은 마흔 여덟에 늦깎이로 문단에 나왔고 데뷰 13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 시집에 실린 시 전체가 고른 작품성을 갖고 있는..

네줄 冊 2018.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