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 이종형

마루안 2018. 4. 21. 22:42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 이종형



세 살에 아비 잃은 소년은
아비보다 더 나이 든 사내가 되었습니다


유품이라고 남겨진
새끼손가락 같은 상아 도장 하나
그 세월 긴 인연을 벗겨내기에
한없이 가엽고 가벼우나
마침내 사내는
세월을 거슬러 돌아와
소년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먼 길을 돌아 걸어온 순례의 끝
죽음의 그늘을 벗기는
꽃이 피고 봄이 오고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간절한 노래는 다시 시작되나


나는 아직도 당신과 작별하지 못했습니다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








봄바다 - 이종형



붉은 동백꽃만 보면 멀미하듯
제주 사람들에겐 4월이면 도지는 병이 있지
시원하게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생손 앓듯 속으로만 감추고 삭혀온 통증이 있어


그날 이후
다시 묵직한 슬픔 하나 심장에 얹혀
먹는 둥 마는 둥
때를 놓친 한술의 밥이 자꾸 체하는 거라
시간이 그리 흘렀어도
깊고 푸르고, 오늘처럼 맑은 물빛 없으니
한걸음에 내달려 보러 오라고 너에게 기별하던 봄바다만 보면
요즘은 별나게 가슴 쿵쿵 뛰고
숨이 턱턱 막혀올 때가 있는 거라
세상에서 가장 큰 무덤인 듯
바라보는 것만으로 죄짓는 기분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저 바다 여는 길을 낼 수만 있다면
어미들은 기꺼이 열 개의 손톱을 공양했을 거라


백 년 넘은 산지등대 가는 오르막길
제주항이 내려다보이는 그쯤에 멈춰 서서
아이들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네
누가 애써 씨 뿌리지 않았어도
비탈진 언덕 곳곳에 돌아온 봄꽃, 노란 유채꽃


아이들아, 나오너라
저 꽃무더기 서너 줌 따다가 한 솥 가득 꽃밥이나 지어 먹게
도란도란 둘러앉은 저녁 밥상 받아놓고
부웅부웅 안개길 헤쳐 돌아오는
무적(霧笛) 소리나 같이 듣게





#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한 사람의 일생이 겹쳐 깊은 울림을 주는 시다. 아픔을 견디고 나면 아문 상처에서 환한 꽃이 피어나는 법, 지난 날을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것이 그러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좋은 시란 바로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