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는 봄이다 - 박신규

마루안 2018. 4. 21. 22:17



너는 봄이다 - 박신규



네가 와서 꽃은 피고
네가 와서 꽃들이 피는지 몰랐다
너는 꽃이다
네가 당겨버린 순간 핏줄에 박히는 탄피들,
개나리 터진다 라일락 뿌려진다
몸속 거리마다 총알꽃들
관통한 뒤늦게 벌어지는 통증,
아프기 전부터 이미 너는 피어났다


불현듯 꽃은 지겠다 했다
죽을 만큼 아팠다는 것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찔레 향에 찔린 바람이 첨예하다
봄은 아주 가겠다 했다
죽도록, 이라는 다짐은 끝끝내
미수에 그치겠다는 자백
거친 가시를 뽑아내듯 돌이키면
네가 아름다워서 더없이 내가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때늦은 동백 울려퍼진 자리
때이른 오동꽃 깨진다, 처형처럼
모가지째 내버려진 그늘
젖어드는 조종(弔鐘) 소리


네가 와서 봄은 오고
네가 와서 봄이 온 줄 모르고
네가 가서 이 봄이 왔다
이 봄에 와서야 꽃들이 지는 것 본다,
저리 저리로 물끄러미
너는 봄이다

 


*시집,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창비








곡우 - 박신규



쏟은 꽃잎을 담을 수가 없었다


라면 두 박스를 쌓아놓고
자취방에 숨어 잠만 잤다


가랑비 그치는가, 서툴게
때를 놓친 꽃들이 서둘러 갔다


먼 데까지 실비가 내린다





*시인의 말


마음을 다해 지은 집이라고
편하리라는 법이 있는가,
비가 새고 춥기도 할 것이다
그 비와 눈을 맞으며 당신은 또
참담하게 머나먼 쪽을 꿈꿀 것이다


나를 온
나를 비껴간
나를 관통하고 내다버린
그리운 나들 앞에 엎드린다,
울지는 않을 것이다


뒤늦은 청춘도
때늦고 있는 사십대도
잘 가라, 가서
상처받지 않은 듯이 살다가
다시 오라, 모질게 독을 품은 날로
전생에서 다시 만날 일이다


별것 아닌 고통은 있을 수 없다, 미미한 마음도 없다
마음과 함께 무너진 몸은
마음과 함께 일어나지 못한다
지나간 것은 과연 지나간 것인가
참혹에 버려진 자가
바라보는 꽃을, 하늘을 바라본다


상징과 시를, 생략과 여백을
착각하지 말라, 청맹처럼 꽃이 필지라도
눈멀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