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문 밖에서 피는 그리움 - 이창숙

마루안 2018. 4. 22. 17:27



문 밖에서 피는 그리움 - 이창숙



얼마동안은 눈이 퉁퉁 부었었다 내가
네 이름을 쓰고 기억하고 지우고 또 (어느 날) 버렸을 때
너를 싸안았던 무게가 너무 허전해서
모래 바람처럼 울었을 때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
등나무 잎새 그늘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더라
어머니로부터 받은 탯줄의 힘까지 끊어지더라
끝내 슬픔으로 하늘도 두 강물로 갈라지더라


한참 후 너를 향한 습지가 생기고
공기가 떠다니고
딱딱한 방바닥 위에 나뒹굴던 나의 언어가 詩가 되었을 때
뒤돌아보니 열리지 않는 문, 그러나
자물통이 걸려 있지 않는 문
밤이면 달빛이 살며시 여닫는 문
그 너머


민들레, 네가 내 그리움을 홀로 피워내고 있었구나.



*이창숙 시집, 아무도 없다, 혜화당








봄밤 - 이창숙



밤의 산문(山門)이 열리면
하늘엔 일곱 개의 촛불로 담장 두른 천사의 집이 있네
지붕 위엔 사시장철 아버지의 흰 고무신 한 켤레가 박꽃으로 피어 있고
강가에 나와 조막손 씻는 별 아이의 눈빛이 초롱하고
그 옆으로 그물눈 나부끼는 대명리 바닷가 마을의 십자가 불빛이 흐르네


어둠 속으로 숨는 자목련의 기도 소리가 아름답구나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내 아픈 영혼이 사랑스럽구나
살 오른 새 울음소리도
세상에 내버린 말 모두가 꽃으로 피어나는 밤
오늘도 버리고 싶은 내 슬픈 인연은 동백꽃으로 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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