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장암에서 - 박남원

마루안 2022. 3. 8. 22:10

 

 

백장암에서 - 박남원

 

 

찬 바람 아직 부는 이른 봄

산굽이 물굽이 짚신처럼 길을 떠나

지리산 백장암 같은 곳에 가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잔설이 밀가루처럼 남아있는 산지붕이 코앞까지 다가오며

백장의 거친 숨결이 어슬렁거리듯 넘나드는 천의 계곡

굽이쳐 흐르는 물살이

일순 저승처럼 아찔한 발아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기 일쑤지만

 

그 어지러운 기슭을 올라 일단 백장암 마당까지 이르기만 하면

두툼한 이끼를 탑신에 털옷처럼 입은 삼층석탑이 놓인 절 마당에

오르는 동안 내내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던 지리산이

오히려 그곳에서는 한 식구처럼 모여 있고

세상 너른 바다도 잔잔한 파도로 고스란히 앉아 있다.

 

지심 깊은 꽃 숨결이

힘겹게 지상으로 밀려 올라오는 이른 봄 백장계곡.

아직 바람 불고 살 시린 발아래 세상,

마저 건너듯 돌과 바람길을 애써 거슬러 올라

정토인 듯 절 마당에 이르러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나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 박남원

 

 

나에게 행복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그것은 저물녘 노을 지는 강변을 거닐다 슬쩍 겨드랑이나 볼에 스치는 바람결 같은 것이었을 것이나 더 정확히는 어린 날 천식을 앓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산소에서 하루 종일 됫병에 든 소주를 마시다 끝내 그 무덤가에서 함께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놓은 소주병, 그 소주병 위에 잠시 놀러 온 듯 내려앉아 있던 햇빛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슬픔을 잠시 뒤에 접어놓고 그 옆에 길손처럼 혹은 길거리 공연의 관람객처럼 잠시 서 있거나 머뭇거리는 것들이었다. 이미 내 유년에 양부모의 기세(棄世)가 계셨듯 이미 오래전에 빛이 바래 그래서 또 오래전에 사라져 없어졌어야 마땅한 거라 믿었던 것이 이상하리만치 오래도록 남아있는 그 무엇과도 같은 희미한 그림자였다. 이 낯설고 심지어는 지루하기조차 한 것들을 밤새도록 내가 내 삶의 뒤안길을 걷다가 마침내 아침의 찬 이슬 속으로 돌아 나올 때 대뜸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짐짓 모른 척 그간의 안부를 묻고는 조금 웃거나 조금 재잘대거나 하다가는 또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꽁무니를 내빼버리고 마는 것들이었다. 봄날 한때 복사꽃잎이 붙들고 있던 가지 끝에서 떨어지기 시작해서 지상에 닿는 것만큼의 그 짧은 흩날림의 시간, 또 그 시간만큼의 못다 한 이야기거나 어쩌면 그 시간 안에 잠깐 부르다 만 짤막한 노래 소절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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