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등화관제가 필요한 시간 - 정덕재

마루안 2022. 3. 11. 21:52

 

 

등화관제가 필요한 시간 - 정덕재

 

 

허리 두께가 확연히 다른 남자와 여자가

길을 걸어간다

남자는 인도와 차도를 가르는 경계석을 밟고 간다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는 10대 남자와 여자가

바닥에 연신 침을 뱉는다

보도블럭 사이 물길이 흥건하다

 

택시를 잡는 취객 하나가

손을 흔든다

손을 흔들 때마다 길 가운데로 들어간다

 

밤이 길어 귀가하지 않는 사람

밤이 길어 불이 꺼지지 않는 간판

밤이 길어 달리는 택시

 

지팡이도 길을 잃는

누구도 보행하지 못하는

암흑이 필요하다

 

등화관제를 알리는 사이렌은

몸과 마음의 교대근무를 알리는

신호였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윤수일의 쓸쓸한 아파트 - 정덕재

 

 

8천 5백

설마 8천 5백 원은 아니겠죠

1억 5천

2억 3천 3억 2천

4억

5억 7천 7억 9천 9억 2천

가격도 다른데 같은 줄에 올려놓는다면 동급 취급을 받잖아요

10억

그래요 10억은 되어야 억 소리가 나죠

11억 3천만

12억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13억 5천만

14억 2천만

16억 4천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네요

그럼 어디에 사나요

17억

18억 8천만

20억

고향을 말하는 건가요

21억 5천

22억 2천

토끼몰이하던 동네 뒷산은 평당 만 5천 원으로 들었어요

푸르지오에 3년 래미안에 2년 살았어요

이제 윤수일의 쓸쓸한 아파트는 쓸쓸하지 않아요

24억 3천만

25억

지금은 허공에 살아요

26억

27억 28억 30억 3천 43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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