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길인 것을 - 김일태
지독하게 사랑을 해 본 이들은
안다
그리운 것들끼리는 언젠가 만난다는 걸
왜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더디게 돌아가는 길도 지겹지 않다는 걸
길은 흐름이다
흐르면서 길을 낸다
모든 일이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듯이
새 길은 험하고 외롭지만
길을 찾다가 고이면서 다시 풀려 흐르면서
스스로 깊어지고 넓어져 가면서 흐름은
소리 없이도 뜻이 되는 곳에 닿기 위한 몸짓이라는 걸
안다
늘 마지막이고 처음이다 지금은
두려워 말자
밤은 단지 어제와 오늘을 잇는
길일 뿐이다
*시집, 바코드속 종이달, 시학사
가을, 짧은 - 김일태
어줍잖은 만남일지라도
목 메고 몸 지는 일일지라도
좀 그립다가 왔으면 좋았을걸
마음끈을 채기도 전에
주인공이 떠나고
그늘 없는 뙤약볕 아래
바람을 기다리다 지친 조역들
아무 질량감 없이
무심무심 무대를 내려가고
박소 소리
빈 객석을 구르고
단막 무대 닫히면서 내걸리는
입동
*시인의 말
북데기 같이 여겼던 일상과 이유 없이 미웠던 이들까지도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가 알라고
지독한 고통이 내게로 와서
날마다 갈던 욕망의 칼마저 버리게 하고는
으름장 놓다 돌아갔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의 나이로 접어들었지만
내면을 투사할 길은 아직 막막하기만 해서
나는 지금
볕살 홍근한 양지녘에 착하게 앉아서
몸에 시심(詩心)이 되돌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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