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바닥의 권력 - 이은심 시집

마루안 2018. 10. 31. 22:56

 

 

가능하면 유명 출판사가 아닌 곳에서 발행하는 시집을 찾아 읽으려 한다. 시중 서점에서든 인터넷 서점이든 독자에게 알려지는 것부터가 중소 출판사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아예 서점에 깔리지도 못하고 구석에 자리했다 사라지는 책이 부지기수일 거다.

 

밥 먹는 일 빼고 매일 시집을 읽더라도 세상의 모든 시집을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래도 열심히 시를 찾아 읽다보면 좋은 시집도 만나고 가슴 설레는 시 속에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시집이 그렇다. 숨어 있기 아까운 보석 같은 시집이다.

 

이은심 시인은 그리 알려진 시인은 아니지만 내가 마음 속에 담고 있는 시인이다. 우연히 뒤늦게 발견한 그의 첫 시집을 읽고 열렬한 독자가 되었다. 나를 설레게 했던 시인이었는데 한동안 시집을 내지 않아 잊고 지냈다.

 

이 시집도 우연히 발견했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갑기 그지 없다. 여전히 이 시인 특유의 정갈한 문장으로 자기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낮은 곳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가슴에 고인 슬픔을 잘 추스려 맑게 걸러낼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다.

 

 

헌 와이셔츠 누렇게 절은 소매를 숭덩 잘라 입고 감자밥을 안치던 여름 지나

 

놉일로 받아온 고구마 자루를 윗목에 기대어 두고

입 큰 쌀독이 시래기죽을 멀겋게 끓였다

 

연탄을 세다 말고 헌 양말짝을 독하게 뭉쳐 불구멍을 틀어막는

입동 시린 뺨에 엎드리면

무던한 며느리 시름시름 앓듯 방바닥은 데워지다 말다 뚝 끊어져서

 

*시/ 어린 겨울/ 일부

 

 

면도날에 손가락을 베이듯 가슴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가는 문장이다. 당연 젊은 시인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싯구다. 연륜과는 별개로 조금 年式이 있어야 이런 표현도 가능하리라. 소주 내리듯 한두 방울씩 떨어져 고인 슬픔도 잘 익히면 이렇게 맑아지는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배워서 익힌 기술이 아니라 타고난 천성일 수도 있겠다. 그러면서도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밀도 있는 문장에서 탄탄한 시적 내공이 느껴진다. 추천하고 싶은 좋은 시집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환(幻) - 이은심

 

 

흰콩을 삶아 띄운 청국장을 슬픔에 섞어 매일 먹으면 변비가 없어진다

 

우유에 잊지 못할 이름들을 고루 섞어 발효시킨 것은 속을 편하게 한다

 

마른 눈동자를 첩첩한 산안개에 푹 담가 두면 느지막에 신선을 볼 수 있다

 

개암나무 열매는 소나기에 젖은 잡병을 없애고 잡념을 없앤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법을 살살이꽃에게 배워두면 뜻하지 않게 친구가 생긴다

 

비극을 관람할 땐 누군가의 찢어진 가슴 속이 가장 안전하다

 

돌에서 새까만 손톱이 돋아나기 전에 어린아이와 눈을 맞추고

허무주의자의 눈물도 한 봉지 사둔다

 

늙은 내외가 손잡고 오래 걸어가려면 궁핍 같은 것이 뜨거워질 테니

생강이며 인동초 달인 물로 마음을 씻어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새겨 잘 지켜 행하면 겨울에 살집을 얻은 듯

언 발을 이불 속에 밀어 넣은 듯 평안할 테지만

 

내 몸의 일부가 이미 저물고 있다고 침술사가 말한다

 

사실을 사실적으로 말하니 빗속에 홀로 나와 앉은 듯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