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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세수 - 박형권

장엄한 세수 - 박형권 폭탄주에 쓰러졌다가 눈을 뜬 아침에 알았네 내 어깨에 아이 둘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아내가 화장품을 안 사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그 벼락같은 아침에 번쩍하였네 시래깃국 냄새 번져가는 반경까지 이웃과 어울려 살 기회가 세상에 있어 도움 안되는 나에게까지 주어진다는 것에 전율하였네 어제는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에게 대들다가 물먹었고 또 어느 나라에서는 민간 항공기가 추락하였고 집, 울, 지붕이 날아갔다는 아침 여섯시 뉴스를 들으며 나는 못난 수캐처럼 컹컹 흐느끼고 말았네 그래, 다 내가 그랬네 나의 무심함이 끝까지 바라보아주지 않아서 그리 되었네 떨리는 아침, 세숫물에 비친 내 얼굴에도 주름이 지고 감사하게도 새치가 고뇌처럼 돋아나네 부끄러우면서도 살아 있는 것 황홀하네 때 묻은 얼굴..

한줄 詩 2019.04.29

소록도, 너 - 서규정

소록도, 너 - 서규정 한두 번도 아니고 길을 나서 툭하면 불심검문에 걸려선 남에게 해악을 끼치며 살긴 살았나 보다 안주머니에 넣어둔 주민등록증이 뒷주머니에서 삐져나오듯이 엉덩이 살이 주르르 녹아내리듯 하염없는 육탈 끈적끈적 바람이 부는 녹동항에서 모처럼 답을 잘 단 시험지에 이름 안 쓰고 낸 것처럼 물결은 파랑주의보가 답인지 떨기는 왜 떨어 싸 내 이름 석 자 지니고 부들부들 떨며 반생을 훌 넘어왔으나 이름은 옆에서 천둥소리로 부를 때보다 거울 속에 든 나를 내가 가만히 부를 때 숨이 멎는 것을 화장실까지 따라온 전경 녀석이 주민등록증을 다시 쥐어주며 제 이마에 붙은 파리 잡듯 거수경례를 올려 부칠 때 이 친구야 이쪽이 저쪽이고 가는 것이 오는 것 아니겠는가 묻지도 않은 말을 빙의에 걸린 듯 내뱉는 해..

한줄 詩 2019.04.29

적산가옥 - 김재진

적산가옥 - 김재진 오랜만이야, 하고 속삭여 봤다. 많이 늙었네, 하며 돌아오는 소리가 복도 지나 먼지를 털며 걸어 나온다. 낮잠 자다 해거름에 일어나 학교 늦다고 허둥대며 가방 챙겨 뛰쳐나가던 어릴 적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봤다. 변소에 빠진 아이를 씻어내던 수돗가에 여선생님 닮은 분꽃은 피지 않고 구충제 먹듯 아득해지는 옛길 일으켜 교문 나서면 문방구 건너 이발소, 줄장미 피던 양옥집 지나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 가파른 적산가옥 한 채 보인다. 자전거 타고 귀가하던 아버지가 눈에 밟혀 열차 따라 남쪽에 온 저녁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이 달그락거리고 이불 위에 쪼그리고 앉은 다 늙은 소년 하나 발가락에 묻은 밥풀 떼내고 있는 옛날 살던 동네에 가봤다. *시집, 산다고 애쓰는 사람에게, 수오서재 한 방울 ..

한줄 詩 2019.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