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세수 - 박형권
폭탄주에 쓰러졌다가 눈을 뜬 아침에 알았네
내 어깨에 아이 둘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아내가 화장품을 안 사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그 벼락같은 아침에
번쩍하였네
시래깃국 냄새 번져가는 반경까지
이웃과 어울려 살 기회가
세상에 있어 도움 안되는 나에게까지 주어진다는 것에
전율하였네
어제는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에게 대들다가
물먹었고
또 어느 나라에서는 민간 항공기가 추락하였고
집, 울, 지붕이 날아갔다는 아침 여섯시 뉴스를 들으며
나는 못난 수캐처럼 컹컹 흐느끼고 말았네
그래, 다 내가 그랬네
나의 무심함이 끝까지 바라보아주지 않아서 그리 되었네
떨리는 아침, 세숫물에 비친
내 얼굴에도 주름이 지고 감사하게도 새치가 고뇌처럼 돋아나네
부끄러우면서도 살아 있는 것 황홀하네
때 묻은 얼굴 경작(耕作)하다가, 세수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이렇게 오늘따라
장엄한가
어서 씻고 밥 먹고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올라
밥벌이하러 가야겠네
오늘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끝내 행복하고야 말겠네
*시집, 전당포는 항구나, 창비
강원 씨의 건강원 - 박형권
강원도에서 온 강원 씨가 건강원을 하는 것은 이름값 하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는 이 서울에서
밥벌이가 되지 않아
낙향해야지 하다가 불볕더위를 만났다
그때 강원 씨는 살모사와 꽃뱀과 능구렁이의 추억으로
이 골목 많은 동네의 건강을 달이다가
꼿꼿이 대가리를 치켜세운
가게 임대료에 발목을 물렸다
넣어도 넣어도 희석되지 않는 독의 똬리!
그러고 보면
희망이라는 이름의 서울의 욕망에게
물려받은 자갈논과 화전밭을 고스란히 팔아서 퍼넣은 것이다
그리하여 강원 씨는 돌아갈 강원도가 없다
팔월의 땡볕 옆을 지나가던 나는
밥집 일 나가는 아내의 팔다리가 쑤신다는 말을 떠올리고
뭐 좋은 것 없나 기웃거리는데
번쩍!
멸종 위기에 이른 살모사가 내 뒷덜미를 문다
아내와 나는 운 좋게도 물려받은 것이 없어서
퍼넣은 게 건강밖에 없다
이제 돌아가야 할 건강이 없다
헐값에 건강을 팔아 비싸게 건강을 사야 하는
강원 씨의 건강원에서
여름 한철의 건강을 구경만 하고 돌아나오는데
살모사 한마리가 진땀 흘리며 제 꼬리를 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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