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플라타너스 초등학교 - 백무산

마루안 2019. 4. 29. 21:55



플라타너스 초등학교 - 백무산



고된 세상을 한바퀴 떠돌고
플라타너스 새잎 돋는 교실에 다시 와서 본다
모국어의 첫 글자를 익히던 푸른 그늘 아래


플라타너스 허리에 1-4 푯말을 묶고
그 아래 작은 칠판 하나 걸고
그 그늘 밑 흙바닥을 깔고 앉아 우리는
연필에 침을 발라 가나다라를 받아 적는 동안


메뚜기가 공책 위에 똥을 싸고
나비들이 크레파스를 핥고
구름이 후드득 머리 위에서 쉬를 하고
새들이 가갸거겨 글씨를 물고 다녔다


힘센 선생님들이 풍금을 옮겨다 주고
스무살 뽀얀 여선생님이 노래를 들려주면
아지랑이 폴폴 일어 나비가 되곤 하였다


책상이 더 있어야 했으나
구름이 일찍 몰려왔다
작은 주먹을 쥐고 머리띠를 묶고 쳐부수자고 외쳤다
허기진 몸에 몽둥이로 식민의 규율을 단련해야 했다
하얀 도화지를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채웠다
고개를 숙이고 우리는 떠났다


거친 세파에 쓸려가고 난파되면서
우리가 배운 연둣빛 글씨들은 흉기가 되어갔다
아픔을 불러오고 흉흉한 시간을 불러왔다
많이 잃어버리고 많이 불구가 되어 돌아왔다


그 연둣빛 시절을 잊을 수 없었다
하얀 종이 위에 싹이 나고 이름이 움트던 시간들을
몸에 새순이 돋고 글씨들이 두근거리던 시간들을
그 기쁨의 플라타너스를 잊지 못했다


다시 와서 그 첫 이름들 불러보기도 전에 눈물이 난다
그 이름들 불러 새로 움트게 할 수 있을까
내 이름만 같은 그 모든 이름들을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마음이 천재지변이다 - 백무산



창밖을 봐봐 눈이 와 저리 한 사나흘 퍼부었으면, 그런
전화 한통 못한다 도시에 오는 눈은 금세 천재지변이다
금세 재난상황이다 금세 쓰레기 대란이다
어느새 도시뿐 아니다
눈에 지워진 길 오지 않는 완행버스 기다리던
시골 할머니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시골사람은 다 죽으란 말이냐! 내지르는
그 소리 참 야속하다 그러나 어쩌나
시골도 오전에 차가 끊기니 오후에 천재지변이다


저리 아름다운 눈 오시는 참에 밖으로만 나돌던
마음 갈피 쟁여 전설이라도 몸에 푹 익혀두면 좋으련만
하지만 또 어쩌나 재난은 대부분 없는 사람들 차지
부자나라 쓰레기는 저지대 사람들의 재난
길 끊겨 고립이라지만 실상은 자립이 사라진 때문
사통팔달 길 뚫고 무선전화 번개처럼 뚫어놓고도
길 없던 시절에는 없던 말 소통 소통부재가 소통하는데
하향 소통이다 모든 길은 빨대처럼 빨아들이는 대롱이다


일년에 공휴일 백스무날에 휴가에 노는 날 주체 못해도
사나흘 눈이 오니 죽기살기다
제트기 타도 빠듯하고 백날을 놀아도 빠듯하고
번개를 타도 빠듯하고 빠르면 빠를수록 인생이 빠듯하다
시간이 점점 곤두선다 수직으로 선다 곤두선다
곤두서다 생은 한순간 꽈당 자빠진다


아궁이에 군불 넣고 장독대 쌓인 눈 털고
고구마 찌고 김치 내고 겨울 고요에 몸 불려 담그는 일
전설이다, 여우 늑대 울던 시절의 전설이다


아직도 눈을 기다려 겨울이 오면 아이처럼 보채는 나도
눈 온다 좋아하기 민망하다 참 민망하다
동심이 천재지변이다
마음이 천재지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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