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중에 오는 것들 - 박미란

마루안 2020. 4. 19. 21:35



나중에 오는 것들 - 박미란



오라는 연락이 왔는데 이젠 도리가 없습니다


잎잎이 춤추던 바람이
시들해지지만
이곳은 춥고 춥지 않다 해도 갈 수 없습니다


꽃들의 고성(古城)을 고대한
봄날은
순간을 다하여 저물었고


악착같이 버티던 공기처럼
서서히 타들어가는
땅끝에 서면


죽겠다던 사람은 죽지 않고
살겠다는 사람은 더 오래 살아


천지가 감당하지 못한 꽃 멀미입니다


그날, 그날은 발 헛디뎌 왔다 가고
나중 오는 것들이
먼저 꽃핀다는 다른 세상을 생각하며


캄캄해서 잘 보이는데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봄날의 한복판입니다



*시집,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 문학과지성








성산 일출봉 - 박미란



아름다운 것을 품으면 모든 게 사라져도 사람은 남는다


얼마나 많은 비와 바람이 다녀갔을까


어느 날,
헤어질 수 없는 그 사람마저
떠나가고


허연 물거품만 해변을 떠돌다가 흘러왔다


이제 기쁠 일도
특별히 안될 일도 없는데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던 당신의 병이 깊어졌다 슬픔은 언제나 묵직해서 혼자 가려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