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갈대 - 박수서

마루안 2018. 3. 8. 21:53



갈대 - 박수서



알아서 쓰러진 일은, 높이 나는 솔개를 바라보다 들통났기 때문이다
큰바람보다 먼저 누워버린 일은, 스스로 목초지가 되고 싶어서다
생의 속 게워내고 우는 일은, 속없이 사랑한 습지를 닮아버려서다
세상 탓 못하고 버리는 일은, 비겁하게 물러남을 배우지 못해서다
안고 싶어도 곁만 스치는 일은, 서로의 따뜻함이 갈대밭을 태울 불씨가 될 수 있음을 걱정해서다
사랑한다고 아주 작게 말하는 일은, 세상의 귀를 모두 막기에는 갈꽃이 너무 가벼워서이다



*시집,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 북인








구이저수지 - 박수서



살다보면 어느 날은
막판까지 다 씹고 퉤 뱉어버린 껌처럼
세상 밖으로 버려져 가라앉는 몸이
가볍다


나는 단 한 번도 물 밖을 나가지 않았는데
비린 물 끝에서 허우적거린다
팔다리 쫙 벌리고 금방이라도 빠져버릴 것같이
위태롭게 둥 둥 떠 있다


내 몸이 물의 중심을 똑바로 잡을 수 있도록
그렇게 작두 위 무당처럼 가벼웠다면,
나도 세상 사람들에게 따뜻한
물안개나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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