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로 가는 빗소리가 그치면 - 박종해

마루안 2018. 8. 30. 21:56



가을로 가는 빗소리가 그치면 - 박종해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행간에
비가 내린다.


처서를 건너온 비는
귀뚜리미의 목청을 틔우고,
여름의 팽팽한 오선지를 풀어서
빗방울을 통통 튕겨낸다.


가을을 부르는 서늘한 빗소리가 그치면,
달은 하늘 더 멀리 구름의 주렴을 걷어 올려,
화안한 얼굴을 내밀며,
호밀밭에 금빛 가을의 말을 뿌린다.


나는 호밀밭 언저리에 서서
귀뚜라미 편에 너에게 소식을 띄운다.
네가 산다는 별 숲 나라 그 어디까지
나의 목소리가 닿아서,
너는 수억 광년 빛으로 나를 찾아오리라,
만리에 가을이 서슴없이 파문져 오듯이,



*시집, 소리의 그물, 서정시학








가을비 속에는 - 박종해



풀벌레는 빗소리를 감고 운다.
빗속에 녹아들어 온몸으로 울다가,
풀잎의 이마와 어깨를 타고 간들거리다가,
뜰에 내려 또르르 굴러서,
봇도랑으로 여럿이 함께 달려가
비로소 냇물 소리를 내며 풀어진다.


이 비가 그치면,
코스모스 여윈 목덜미에
하늘의 손이 내려와
스산한 바람을 감아 주리라.


찬연하던 시절이 한순간에 잦아들어
풀벌레는 빗소리와 멀어져 스스로 운다.


만리에 외로움을 한 몸에 두르고,
어둠에 젖은 산과 들판에
제 모습 제 이름을 감추고,


선하게 선하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제 몸이 풀어져 눈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