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픈 유턴 - 조연희

마루안 2018. 8. 28. 22:31



슬픈 유턴 - 조연희



그리운 것들은 늘 왼쪽에 있다.
나는 당신 쪽으로 좌회전하고 싶었지만
중앙분리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라고
지시등이 핸들을 꺾을 때마다
한 정거장씩 멀어져가는 집과
방향이 바뀌어버리는 길들.
기다림은 왼쪽에서 더욱 무성해지고
한번 잘못 든 길이 지워버린 풍경이며 샛길
번번이 차선을 놓치던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전용차선이 끝날 때까지 무작정 달려야 했다.
기다림이란 늘 발목이 붉게 물드는 일이어서
추돌이 위협을 느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왼쪽으로 핸들을 꺾고는 했다.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 노마드북스








고도리 - 조연희



창밖에서는 쏴아 흑싸리 흔드는 소리가 들리고
그럴 때마다 얘, 누가 온 것 같아.
엄마는 2월 매화 열 끗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오빠가 집을 나간 건 기러기가 대이동을 하던 계절이었다.
팔월 공산의 세 마리 새처럼
그렇게 지붕을 넘어간 가족들


나는 칠월 홍돼지처럼 날마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다.
정말 형편없는 패야.
철마다 매화 벚꽃 난초 모란 국화가 피어나는
카키색 군용 담요는 한때 우리의 정원
우리 가족 다섯, 고도리처럼 다시 모여
함께 만두를 빚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삶은 뒤집어야만 볼 수 있는 패였다.
엄마가 찾고 있는 패는 없는 게 아닐까.
언니는 왜 섣달 비 쭉정이 같은 사내를 꼭 쥐고 있는 것일까.


얘, 누가 온 것 같아.
엄마는 끝나지도 않은 화투를 접으며 말했다.
열 끗 중 한 개의 패가 내 아버지였지만
아직도 난 내 패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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