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 - 백성민

마루안 2018. 8. 30. 22:09

 

 

길 - 백성민

 

 

한발만 내딛으면

토끼가 산다는 저 먼 내일 앞에 서 있을까

절구 공에 빻아지는 것은 누구의 백골일까

어느 서리 깊은 날

신들의 조상을 위해

소복(素服)한 거리는 창백한 각혈을 한다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오래된 길

앞서 걷는 사람과 돌아보는 사람 모두는

생의 반환점을 돌았을까

수없이 보낸 암호에 답신은 달빛에 묻어나는 흰 자국뿐,

 

누군가 두고 갈 그 흔한 흔적 하나

달려오다 멈춘 풍경 안에 걸려 있고

그림자를 지우는 나무 아래

순한 눈빛은 오랜 바람 속을 서성인다.

 

 

*시집, 워킹 푸어, 고요아침

 

 

 

 

 

 

위킹 푸어* - 백성민

 

 

그가 눈을 뜬 것은 새벽이 채 잠에서 깨지도 않은 시간이다

그의 자리 한 뼘 너머

행여 곤한 잠 속에서 불러내고 싶지 않은 미지근한 온기가

어둠처럼 웅크리고 있고

숨을 참아가며 방문을 연다

 

방비할 틈조차 없이 밀고 들어오는 싸늘함

쪽마루에 디딘 발끝이 등덜미를 후려치고

움츠러드는 어깻죽지가 진저리를 치다

마주치는 별빛 하나가 푸근하다

 

열고 닫을 문조차 없는 행색뿐인 부엌살림은

알전구 하나에 호사스럽고

어젯밤 남겨두었던 찌개냄비에 물 한 컵과 소금 한 수저 풀어 넣는다

 

으깨진 두부 몇 조각과 신 김치 몇 조각이

기름기 하나 없는 창자 속을 채우는 것도 복이라고

야무지게 다지는 가슴 한구석이 축축하게 젖어온다

 

수삼일 전부터 고기 한번 먹고 싶다고 투정질 하던 어린 아들놈에게

운수 좋아 품삯이라도 후하면 비린 생선 한토막이라도 사다 먹여야지 하는 생각은

눅눅한 웃음 한편을 물들게 하고

개다리 상을 들어 늪 속 같은 방안으로 밀어 넣는 등덜미가 써늘하다

 

 

*워킹 푸어(working poor): 일하는 빈곤층이라는 뜻. 저임금의 육체노동자들, 임시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열심히 일해도 저축하기 빠듯할 정도로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계층. 이들은 갑작스런 병이나 실직 등으로 한순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