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 바람 한번 만져보려고 - 서규정

마루안 2018. 8. 29. 21:23

 

 

저 바람 한번 만져보려고 - 서규정


팽팽하게 당겨져 살고, 팽팽하게 박혀서 죽을 저 과녁을

마지막 화살로 이해해 가야 한다

겨냥, 사는 게 구지구질해선 안 돼

명중, 파르르 꼬리 떨리는 미세한 울분이라도 참아야 돼

사수가 쏘아 맞추는 것은 발등뿐

발사의 사거리가 짧다

아니다, 너무 길다

저 바람 한번 만져보려고 제 눈을 제가 찌르고 난 뒤의 사랑, 이거


*시집, 참 잘 익은 무릎, 신생

 

 

 

 

 

 

끼니 - 서규정


바늘이 끼니였다
마른 호박잎 소리 없이 지듯 가세가 몰락하면서
어머니, 소쿠리를 들고 남의 밭둑을 지나가는 악극인처럼
시키지도 않은 춤과 재담을 늘어놓고도
늘 빈 소쿠리로 돌아와
바늘 하나 꽂을 땅이 없던 그 들판에선
끼니가 바늘이었다
더더구나 강물은 강둑을 타고 넘실거려
낮은 추녀 밑에서 오돌오돌 떨며 바라보던 마당엔
비도 빛도 다 바늘만 같아선
오냐! 끼니를 얻으려면 먼저 미끼가 되어야지
어머니 연분홍 치마를 들쳐 업고 서울로 떠나던 역전에서
아이스케키 하나에 금방 치맛자락을 놓고 떨어졌지만
무엇인가가 손등을 타고 녹아 흐르고
소식보다 바람이 한 줄 빨랐을까
늘어진 빨랫줄 끝으로 몰린 어머니의 고쟁이가
깃발처럼 나부낄 땐 만세를 불렀던가 말았던가
만세나 항복은 왜 똑같은 동작으로 두 팔을 들다 마는지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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