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새벽 잠 깨어 보면 - 홍신선
돌아누운 내 등 뒤로 굽이치는 맑은 강물 소리
범람하는 실솔들 울음소리에
이내 잠도 꿈도 몽땅 떠내려가 버리고
고요에 귀를 대이면 이 고요를 강탈해 더 깊은 고요에 가 터놓는
경로당 앞 고목의 낙엽 흩는 소리.
누군가 먼 길 가는 신발이라도 찾아 신나 보다.
고래실 건넛집 안뜰에 불이 환하고
나도 이제는 마음 툭툭 털어 가진 것 모두 내려놓아야 하리.
실솔들의 강물 소리 말라 잦고
지난 잎들 다 떨구어야 비로소 헐벗은 체 본래에 돌아 가는
겨울 적막 앞에 마악 서기 직전 나무처럼.
가을 새벽 잠 깨어 보면.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내 안의 절집 - 홍신선
이 가을 찬비에 온몸 쫄딱 젖은 늙은 고양이가
절집 처마 끝에 은신해 그 비를 긋고 있다.
명부전 뒤 으늑한 어느 땅이 생판 모를
한 포기 민들레를 가부좌 튼 무릎 위에 앉히고
서로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로 시간을 말리며
화엄 하나 이룬 것을
또 그 옆에는 고목이 고색창연한 제 슬하를 비워
담쟁이덩굴 두어 가닥 거둬 양육하는 것을
내 안의 어딘가 그런 절집 하나 찬바람머리 부슬비 속 그린 듯 앉았다.
이건 내 세월도 아닌데 적막을 착취하는 이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속울음 삼킨 고양이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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